









신랑 찾기
헤바론 니르타|산기슭
그녀는 결심했다. 내 낭군 될 자의 얼굴을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날이 제법 좋은 봄날, 방에 앉아 서책을 펼쳐두고 열심히 딴 생각을 하던 그녀가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어제 우연히 들은 부모님의 대화가 한몫했다.
- …막내 혼처가 정해졌…
- 신랑감은 역시… …해야…
- …괜찮… …그래도 좋을지…
- 그쪽은 모레쯤… 도착할 것이라고…
결코 몰래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대화에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녀는 잠시 스스로 변명을 주워섬긴 뒤, 들은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아무래도 내 혼처가 정해졌다는 것 같지? 게다가 그 상대가 곧 고을에 도착한단 말이지.
그쯤 되자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시종 분이는 고을에 일어나는 일들을 아침저녁으로 자신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는 소소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바로 그 분이의 말에 따르면 바로 내일, 도성에서 양인(洋人)이 이사를 온다 했다. 그녀의 집에서 시장을 지나 다리 하나를 건너면 숲을 끼고 제법 넓은 집 한 채가 나오는데, 그곳으로 이사를 올 예정이라 미리 온 일꾼들이 안팎을 쓸고 닦느라 분주하다고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양인이 이사 오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할 일이라고, 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직감했다. 내 신랑감은 필시 그 양인일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이 근방에는 그녀의 집과 혼사를 맺을 만한 가문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비슷한 집안의 자제들은 이미 혼례를 올렸고, 올리지 못한 자들은 행실이 좋지 못한 자들뿐이었다. 혼처를 제법 까다롭게 따지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런 집안에 그녀를 보낼 리가 없었으니, 그녀의 경우 타지에서 수준이 비슷한 혼처를 구하는 선택지만 남은 셈이었다. 아버지라면 딱히 양인에 대한 편견도 없는 분이니, 지난번 도성에 들렀을 때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그냥 얌전히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소개해 주는 자리에서 신랑감 얼굴을 볼 것이냐, 아니면 그전에 몰래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올 것이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얌전히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소개해 주는 자리에서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게 맞긴 했지만, 그녀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가끔 상상하곤 했던 이상적인 남편감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내일 도착한다 하더라도 이사 온 집의 정리라던가, 아버지와 방문을 알리는 서신을 주고받는다던가 하는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은 며칠 후가 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주 운이 나쁜 경우라면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혼례를 올리게 될 수도 있을 테고.
그리하여 이성과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결심했던 것이다. 몰래 가서 보고 와야겠다고.
*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낯이 아닌 낯짝을 가리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기실 그것은 그녀의 환경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예가 출중한 무관이었으나 그 무예보다 아름다운 외모로 더 명성을 떨치곤 했다. 도성의 수많은 화백이 그의 열세 살 적 모습을 그림으로 담지 못해 안달이었고, 약관의 그가 의관을 정제하고 등청하면 궁궐이 훤해져 불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진담이 반쯤 섞인 농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심지어 외국의 사신이 그의 수려한 외모에 감탄해 그 자리에서 시를 지었다는 일화까지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정작 그는 본인의 외모에 대해 너희 어머니 만났을 때나 쓸모 있었다고 말하곤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 역시 단아하고 곱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의 옆에서 박색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그녀의 어머니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호사가들의 주된 평이었으니, 그 미색 또한 두말하면 입 아플 일이었을 테다.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와 곱디고운 여자가 만난 결과, 슬하에 둔 아들 셋은 외양이 아주 빼어났다. 그런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의 외모를 보고 자라 웬만한 외모는 눈에 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항상 아빠만큼 잘생긴 사내가 아니면 결혼하기 싫다고 떼를 쓰곤 했는데, 그것을 꾸짖기보다는 그 말에 허허 웃으며 꼭 잘생긴 남편감을 찾아주겠다 약조했던 아버지나(그야 그녀의 아버지는 ‘아빠만큼 잘생긴’이라는 말이 흐뭇했기 때문이다), 나를 닮아 보는 눈이 높다며 만족스러워하는 어머니, 그리고 당연한 말을 뭐 그렇게 강조하냐는 투의 오라버니들이 그녀의 생각을 더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에 괜히 짓궂은 장난을 치곤했던 아버지 친구의 아들에게 “너는 우리 첫째 오라버니 새끼발가락보다도 못생겼는데 그렇게 예의도 없어서 어쩌니?”라고 말해 사내아이를 울리는 아이로 무럭무럭 자랐지만, 지금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제 예비 신랑감의 얼굴을 확인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무 위에 올라앉아 있었으니까.
*
날이 밝자마자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아침상을 물린 후, 저잣거리를 나설 때 입는 둘째 오라버니의 옛날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거기에 최근에는 유행이 지났다며 잘 쓰지 않는 그의 갓까지 쓰고 몰래 집을 나섰다. 품 안에는 첫째 오라버니가 외국에 다녀오면서 사다 주었던 천리경(지금의 망원경)까지 야무지게 챙긴 채였다.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집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점찍어둔 나무에 몰래 올라가서, 상대 얼굴만 살짝 본 후 바로 내려온다. 그리고 점심 전에 자신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끝! 그녀의 판단으로는 문제 될 건 한 가지도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이라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그녀는 기어코 그 집 안을 들여다보기 적당한 높이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는 계획한 대로 되어 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천리경의 초점을 조절해 담장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어디 보자, 내 님은 어디 계시려나…
양인이 이사 왔다는 집 담장 너머에는 널찍한 마당이 펼쳐져 있었고, 많은 수의 일꾼들이 마당과 사랑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안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에 마당 가운데에 서서 일꾼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는 한 남자가 걸렸다.
와… 진짜 잘생겼네.
몇 해 전, 서양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양인들도 많아졌다. 그 덕에 도성이 아니더라도 머리색이나 눈 색이 화려하고 이목구비가 이국적인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었지만, 저런 선명한 금빛을 띠는 머리카락은 그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아래의 섬세한 이목구비나 훤칠한 키, 탄탄하고 넓어뵈는 어깨까지 어디 하나 빼놓을 구석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던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우리 아버지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다소 엉뚱한 식으로 아버지의 애정을 확신한 그녀는 더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천리경을 갈무리해 품 속에 넣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이 꼴을 들키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지.
목적을 달성한 탓에 올랐던 나무를 신나서 내려오던 그녀는, 곧 작게 비명을 지르며 나무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올라갈 때는 꽤 유용하게 밟고 잡고 했던 굵은 넝쿨들이 내려올 때는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던 탓이었다. 그나마 그 넝쿨들 덕에 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상황은 모면했지만, 바닥에 손도 안 닿는 애매한 높이에 거꾸로 매달린 것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묶인 발을 흔들어 봤다가, 상체를 일으켜서 넝쿨을 잡으려고도 해봤다가, 멀찍이 떨어진 다른 가지를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끙끙대며 몸부림치다가 힘이 빠져 축 늘어지고 말았다. 벌써부터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아무한테도 발견되지 않고 밤이 되어버리면 어쩌지?
“사람 살려…”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작게 말했다가, 이래서는 들을 사람도 못 듣겠다 싶어 좀 더 크게 소리 질러 보기로 하고 배에 힘을 주던 참이었다.
“거 그렇게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하면 누가 듣기나 하겠습니까?”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예상치 못한 사람 목소리에 그녀는 펄쩍 뛰어오를 만큼 놀랐지만 (실제로는 조금 꿈틀거렸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눈물 나게 반가워서, 그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려고 바둥거렸다.
“뉘신지는 몰라도 저 좀 도와주십시오!”
그녀의 다급한 말에도 상대는 말이 없었다. 이윽고 제 앞에 와서 선 그 사내는 허리춤만 보여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멀쩡히 잘 내려오다가 이 꼴이 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인데…”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뭔가 깨달은 그녀가 빽하고 소리 질렀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습니까?”
앞에 선 사내가 그 말에 킬킬거리며 팔을 뻗어 그녀의 발목에 얽힌 넝쿨을 붙잡았다.
“올라가기는 기세 좋게 잘 올라가더니 내려올 때는 아주 볼만하더군요.”
정녕 이 자는 나무를 기어 올라가던 모습까지 이미 다 봤단 말인가? 그녀는 가끔 제 친우가 읊조리던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다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자신이 남자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나무 위에서 뭘 했는지도 봤으려나?
그 사이 묶인 발목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던 사내는 이거 안되겠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잘라야겠는데...”
“제 발목을요?!”
“예?”
그의 어이없다는 듯한 되물음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아, 발목이 아니라 넝쿨 말이구나. 거꾸로 매달려 있으면 바보가 되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자기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 떠올렸다.
“근데 그걸 그냥 자르면- 으악!”
넝쿨을 끊고 떨어지는 그녀를 날랜 손놀림으로 받아든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멀쩡한 발목을 왜 자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의 옆구리에 빨랫 더미처럼 늘어져 있는데도 안심이 되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게다가 아까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어디를 부딪혔는지 팔목도 아프고, 묶여 있던 발목도 시큰거렸다.
불편한 자세에 작게 끙 하는 소리를 내자 그는 옆구리에 꼈던 그녀를 지푸라기 인형인 것 마냥 휙 돌려 가볍게 바로 들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 이리 힘이 세담? 휘청거리면서 바닥에 발을 딛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을 받아든 사내가 굉장한 괴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구해줘서 고맙소.”
감사 인사와 동시에 고개를 든 그녀는 처음으로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를 구해준 이는 그녀보다 머리 두 개는 족히 더 큰, 거대한 곰 같은 덩치의 양인이었다. 곱슬곱슬해 보이는 머리는 붉은 기가 도는 주황색이었고, 초록빛이 감도는 황갈색 눈동자에는 햇빛이 비쳐 반질거렸다.
사내는 그의 나라 것으로 보이는 단순해 보이는 웃옷에 바지를 걸친 차림이었는데, 천이 얇은 것인지 아니면 그의 덩치가 대단한 것인지 옷 위로도 너른 흉부와 두꺼운 팔의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외양에 저절로 벌어지려던 입을 애써 다문 그녀는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만졌다. 그런 그녀를 마주 보던 사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수염이 떨어졌습니다.”
멈칫한 그녀가 자신의 코밑을 더듬었다. 방금 전의 난리로 반쯤 떨어져 덜렁거리는 가짜 콧수염이 손에 잡혔다. 수염을 떼어 숨기며 그녀가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이건 제가.. 수염이 잘 안 나는 편이라서...”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자 앞의 사내는 아까보다 더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관찰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던 그가 물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예, 좀 부딪히긴 했지만 뭐 이 정도는 금방... 억”
옷자락을 털던 그녀가 갑자기 짜부라진 개구리 같은 소리를 내자 사내의 표정이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변한 것 같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쓰고 있던 갓끈의 한쪽이 끊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매듭과 매듭 사이에 들어가 있어야 할 장식 구슬이 빠진 것을 발견한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그녀가 바닥을 두리번거리자 그가 물었다.
“…갑자기 뭘 찾는 겁니까?”
“여기 달린 구슬이 떨어진 거 같아서요…”
끊어진 갓끈을 부여잡고 땅에 코라도 박을 기세로 허리를 굽힌 그녀를 보고 있던 그가 다시 물었다.
“거 그냥 새로 사면 안됩니까?”
“빌린 물건이란 말입니다. 주인이 까탈스러워서 안됩니다...”
“…빌린 물건이면 나무 탈 때는 벗어두고 올라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원래는 쓰고도 잘 올라가고 내려옵니다. 이건 평소에 타던 나무가 아니라서…”
그녀의 말에 뺨을 긁적이던 사내는, 별말 없이 쭈그려 앉아서 함께 구슬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사양도 못하고 울상이 된 채 구슬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주워든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같은데, 맞습니까?”
그의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구슬 몇 개가 햇빛에 반짝였다. 어!!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사내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 기세에 그가 잠시 손을 움찔한 것 같았지만, 그녀의 정신은 온통 손 위의 구슬에 쏠려 있었다.
“정말 눈도 좋으십니다! 제가 진짜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사내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에 구슬들을 올려줬다. 손으로 구슬에 묻은 흙을 조심조심 털어낸 그녀가 말했다.
“이제 고치기만 하면 되겠네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고친담. 그녀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가 말했다.
“끊어지지 않은 부분을 보고 비슷하게 엮으면 될 것 같습니다만… 고쳐줄까요?”
그 반가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가, 이내 머뭇거렸다.
“그, 감사하긴 한데 너무 폐가 되지 않을지…”
그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폐는 무슨… 따라오시오.”
말을 마친 사내는 덩치만큼이나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제가 진짜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런데 어디 사는 누구십니까? 이 근처에서 못 뵈었던 것 같은데…”
그는 그를 급히 따라가면서 떠드는 그녀를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한번 쓱 쳐다본 후 고갯짓으로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집을 가리켰다.
“저 집 사는 헤바론 니르타요. 이곳에는 어제 도착했으니 아마 처음 볼 겁니다.”
오... 이곳으로 온다던 양인이 한 명이 아니었구나.
그가 가리킨 집을 바라보던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물론 그럴 터였다. 보통 양인들은 두서넛 씩 함께 다니곤 했으니까. 어째 그 생각을 못 했네, 하던 그녀는 평소에 쓰는 가짜 이름, 그러니까 첫째 오라버니의 아명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어, 그럼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이 사람일 수도 있으려나? 하지만…
‘걱정 말거라, 아버지가 눈이 번쩍 뜨이게 잘생긴 사내를 찾아다 주마!’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혼담이 무산된 후 내심 상심했던 그녀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까 봤던 잘생긴 사내를 떠올리며 옆의 털북숭이 사내를 흘끔 쳐다봤다.
아무래도 아닐 거 같지?
옆의 사내도 딱히 박색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눈이 번쩍 뜨이게 잘생긴 쪽은 아까 봤던 그자였다.
간단히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그들은 이미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헤바론은 대문을 휙 넘으며 문 앞에서 주춤거리는 그녀에게 물었다.
“안 들어올 겁니까?”
그녀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따라오긴 했는데 들어가도 되려나? 들어갔다가 아까 그분을 마주치면? 그나저나 저 사내는 내가 나무 위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못 본 게 맞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쯤에서 집에 가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비록 끊어진 끈을 본 분이가 우는소리를 할 테지만, 둘이 머리를 맞대면 어떻게 비슷해 보이게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호기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양인이 사는 집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호기심은 계속 속삭였다. 집이 넓던데, 그분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게다가 자기 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면 이렇게 집에 들여 도와주기까지 하겠어?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
그날 밤, 자리에 누운 헤바론은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거야 등 떠밀려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테지만 말이다.
이 동양의 나라와 본격적으로 교류가 시작되면서 왕은 자신의 수하 몇이 아예 이 나라에 자리 잡고 중재하는 일을 맡아주기를 바랐다. 부양할 가족이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 우선적으로 파견되었는데,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이라니 오히려 기껍기도 했고.
다만, 이곳에 아예 정착하는 것은 어떠냐며 혼담까지 들어오면 감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결혼 말입니까?’
‘그래. 다른 곳에 처자식이라도 있나?’
‘아뇨… 없습니다만…’
‘그럼 고려해 보게나.’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해야 할 줄은 몰랐는데. 반쯤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알겠다고 답한 것이 한 달 전쯤의 일이었다. 말이 고려지 이미 상대 쪽 집안과는 이야기가 다 된 일이라, 별일이 없다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여자와 식을 올리게 될 예정이었다.
도착한 곳은 도성에서 며칠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작고 조용한 도시였다. 앞으로도 이런 조용한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지루했다.
그 지루함이 조금 가시기 시작한 것은, 산책이나 할 요량으로 어슬렁거리던 집 근처의 숲에서 웬 수상한 사람이 나무를 타는 걸 발견했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염탐꾼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화사한 옷을 입은 것이, 세상 어느 누가 저렇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염탐을 하러 다니겠는가? 게다가 올라가는 모양새를 보니 제법 날래긴 하지만 영 엉성한 것이...
어느 집 사고뭉치 자제분이 외국인이 궁금했던 모양인데?
반쯤은 맞는 판단을 하며 그는 그쪽으로 느긋하게 다가갔다. 내려오면 뭘 훔쳐보려고 한 건지 추궁할 생각으로 하는 짓을 구경하고 있는데, 올라가기는 잘 올라간 그 수상한 자는 내려오면서 몇 번 발을 헛디디더니 기어코 넝쿨에 발이 걸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말았다. 도와주려고 반사적으로 뛰어간 곳에서 마주한 건, 의외로 곱고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런 얼빠진 놈을 염탐꾼으로 보낼 리는 없겠지. 내심 실소하던 헤바론은 우선 그가 내려준 후에 약간의 협박을 섞은 경고를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떨어지는 그자를 붙잡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여자구먼.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쩐지 선이 고와도 너무 곱더라,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는 경고할 생각도 그만두었다. 괜히 협박 비슷한 걸 했다가 겁먹고 눈물이라도 터뜨리면 악명만 더하겠다 싶어 말도 길게 섞지 않고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정면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앳되어 보이는 뽀얀 얼굴에 정말 안 어울리는 가짜 수염이 반쯤 떨어진 채 대롱대롱 붙어있었다. 헤바론은 그녀의 얼굴에 대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최근 제일 슬펐던 - 술자리에서 시비를 걸리는 바람에 술을 금지당한 - 일을 급히 떠올려야 했다.
어디 다친데 없이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신경 꺼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끊어진 끈을 붙잡고 울상 짓는 말간 얼굴을 마주하니 왠지 그냥 가버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 도와주다 보니 어쩐지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의 그녀가 응접실로 쓰는 방까지 들어와 있었다. 어차피 심심하기도 했으니까 뭐.
자신이 끈을 고쳐주는 내내 그녀는 별걸 다 물었다. 저 무기는 진짜 들고 휘두르는 거냐, 저 장식품은 무엇이냐, 저 비늘처럼 보이는 것은 진짜 비늘이냐, 도대체 어떤 동물이 저렇게 크냐… 호기심 가득한 눈의 그녀에게 순순히 설명을 해준 것은 단순한 호의였다.
그 후, 고친 갓을 받아드는 그녀의 손목이 약간 부은 것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친데 없다더니? 그 상처가 괜히 마음에 걸려서 가지고 있던 약을 건네긴 했지만 금세 괜한 짓을 했나 싶었다. 입은 옷을 보아하니 제법 사는 집 아가씨인 것 같던데, 집에 약이 없을 리도 없고. 그러면서도 그는 그 상처가 계속 신경 쓰였다.
뽀얀 살결에 멍이라도 들면 기분이 영 찜찜할 것 같아서 그렇지, 뭐.
그는 머리를 한번 긁적이고는 돌아누웠다.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거리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이왕 해야 하는 혼인이라면 그런 아가씨가 상대면 재미있겠는데.
*
같은 시각,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그녀도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분이는 오늘도 어디선가 그 양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와 조잘거렸다. 우슬린 리카이도라는 자의 화려한 외모가 이미 도성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것은 그녀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의외였다. 헤바론 니르타라는 자가 산만한 덩치만큼이나 성격이 괄괄하며, 도성에서 기물을 부수고 양반집 자제 몇을 기절시켰다는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분이는 “가끔 성정이 몹시 사나운 자들이 있다더니 그치가 그런 가봐요!” 하며 몸서리를 쳤다.
그런 사람 같지는 않던데.
그녀는 그가 건네줬던 약합을 만지작거렸다. 부어오른 손목을 언제 봤는지, 그가 서랍에서 꺼낸 건 파란색 유약을 발라 구워낸 자그마한 도자기 약합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그것을 건네며 집에 가서 부딪힌 곳에 바르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집에 와 열어보니 연고 특유의 싸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더랬다.
앉아있는데도 뒷산의 바위만큼이나 커다랬던 덩치와는 다르게, 그가 안내해 들어간 사랑채는 그렇게 크지 않고 깔끔했다. 주로 손님만 맞이하는 공간인지 내부에는 장식품과 가구들만 즐비했다. 그녀는 들어가면서부터 보이는 거대한 무기와 이국적인 물건 등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 예의가 아니라는 걸 잊고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그는 그녀의 무례를 탓하는 대신 그녀의 시선이 어디 가닿는지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자기가 끊임없이 질문을 해서 귀찮았을 법도 한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해 주는 바람에 신나서 한참 떠들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아이처럼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더랬다.
그녀는 함께 장식 구슬을 찾아주던 그의 쭈그려 앉은 뒷모습이나 그 큰 손으로 끊어진 끈을 세심하게 고쳐주던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긴, 소문이라는 건 딱히 믿을만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녀는 만지작거리던 약합을 경대 위에 얌전히 올려두고 자리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서랍에서 손수건을 한 장 꺼내 깔고 그 위에 약합을 곱게 올려두고서야 잠을 청했다.
***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신세를 졌으면 바로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르려 한 것뿐인데 왜 일이 이렇게 된단 말인가.
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 앞에 건들거리며 서 있는 세 명의 남자들을 쳐다봤다.
전날 그 헤바론이라는 자에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 집을 나선 그녀는, 좀 빨리 가보겠다고 평소에는 잘 안 가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좁은 골목길을 거의 빠져나올 무렵 웬 무뢰배들이 갑자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부딪혔다고 생떼를 쓰기에 적당히 사과하고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길을 가로막더니 자신을 보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 몰래 나온 벌을 받나…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말이 통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릴 적에 들었던 막내 오라버니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상대가 여러 명이면 눈에 모래나 흙을 뿌리고 도망쳐.’
그녀는 아까 이미 상대가 밀었을 때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척하면서 손에 흙모래를 한줌 쥐었던 참이었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그것을 뿌리고 달릴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갑자기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뭡니까?”
정말 뜻밖에도, 어제 만났던 헤바론이라는 사내가 골목 끝에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손까지 흔들어가며 “여기요! 여기!” 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무뢰배들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봤다가 그의 범상치 않은 덩치를 보고 움찔하더니, 험한 말을 중얼거리며 반대편 골목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그중 제일 인상이 사나운 자는 그녀의 어깨를 확 밀치고 가기까지 했다.
“괜찮습니까?”
아니 도대체 길이 좁은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밀고 가는 거야?
어이없는 표정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무뢰배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그녀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들여다보는 헤바론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놓여 표정을 풀었다.
외양으로만 보면 그 역시 제법 사나워 보이는 편인데도, 몇 마디 나눠본 상대라고 반가움을 느끼는 것이 우스워 그녀는 작게 웃었다.
“예, 다행히도요.”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그의 눈이 아직 꼭 쥐고 있는 오른손에 닿았다.
“손은 또 다친 겁니까?”
“아.”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손에 흙모래를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손의 힘을 풀자 쥐고 있던 흙모래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걸 본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혹시 그걸 뿌릴 생각이었습니까?”
“예, 뭐… 빈틈을 좀 만들어볼까 했습니다.”
“그리고 공격하려고요?”
“아뇨? 도망가려고요.”
그녀는 손을 탁탁 털어 남은 흙을 털어냈다. 한숨까지 쉬는 모습에 헤바론은 자기도 모르게 웃다가 그녀의 못마땅한 눈초리를 받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도망가려고 했던 게 웃깁니까?”
“그럴 리가요. 도망치는 방법도 영리해야 찾는 거지요.”
그의 말에 뾰족하게 반응한 것이 머쓱해진 그녀는 괜히 몇 번 더 손을 털었다.
“…누가 알려준 방법이긴 하지만요.”
“그 와중에 그 방법을 떠올리다니 용감하시기까지 하군요.”
그는 흙먼지로 더러워진 손을 찝찝해 하는 그녀에게 품속의 손수건을 건넸다.
“그래서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지난번에 신세도 졌고 해서 갚으려고 그쪽을 찾아가던 길이었지요.”
“음… 다음부터는 큰 길로 다니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럴 생각입니다.”
조금 시무룩하게 답한 그녀가 물었다.
“그… 니르타…라고 했었지요? 공께서는 어쩐 일로 이런 곳을 지나고 계셨던 겁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헤바론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저야 뭐… 그냥 산책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골목길을 둘러보았다.
“산책이요...”
“예. 제가 골목길을 좀 좋아합니다.”
그녀는 가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뻔뻔하게도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가 왜 이런 골목길에 나타난 것인지 캐물으려다 관두고 자신의 목적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거, 잘 되었군요. 바쁜 일 없으면 같이 갑시다.”
헤바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내 어제 은혜를 꼭 갚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며 그를 이끌었다.
*
애초에 그를 데리고 가려던 곳은 가벼운 차림새로는 갈 수가 없는 곳이라, 그녀는 약간의 고민 끝에 저잣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객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기 시작하는 객점의 길가 쪽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음식을 주문한 그녀는 앞에 앉은 그를 흘끔거렸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됩니다.”
어떻게 알았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헤바론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멋쩍은 얼굴로 잔을 들어 입을 축인 그녀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그… 소문에 말입니다. 도성에서 사람 몇을 때려눕혔다던데… 그거 사실입니까?”
실실 웃던 그는 간신히 입에 담고 있던 찻물을 삼켰다. 그러고는 머쓱한 듯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소문이 여기까지 났나.
헤바론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술에 취해서는 당장 대련을 하자고 하길래, 술 깨고 다음날 하자 했더니 끈질기게 달라붙더군요. 그래서 피했더니 달려들지 뭡니까.”
“오… 그래서 제압한 겁니까?”
그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아뇨. 제풀에 발이 꼬여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는 기절해버리더군요.”
허. 그녀는 혀를 찼다. 어딜 가나 그런 인간들은 꼭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첫째 오라버니도 무위가 상당하여 종종 그런 시비에 휘말리곤 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 분들이 본 대로 이야기해줘서 해명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소문이 그렇게 났군요.”
“소문이라는 게 그렇지요. 원래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말하곤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대꾸하며 그녀는 이제야 개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습니다. 공께서 이유 없이 사람을 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날 언제 봤다고 그렇게 장담합니까?”
그 녀가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그 표정을 보고 씩 웃은 헤바론이 덧붙였다.
“제가 거짓말 한 거면 어쩌려고요?”
“…거짓말이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
그녀는 그 정도야 딱 보면 알지요, 하고 가볍게 응수한 후,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그에게 이것저것 권했다.
언제 봤냐고 장담하냐니, 처음 본 사람을 턱하니 집에 들여 도와주고도 잘도 그런 말을 하네.
물론 그의 덩치를 생각해 봤을 때 자기같이 비리비리한 자는 별 위협이 안될 거라 싶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선뜻 도와주기가 어디 쉬운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그녀는 새삼스럽게 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도 가벼운 차림새였는데, 저 단순해 보이는 옷도 덩치가 좋은 몸에 걸쳐두니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목덜미와 소매 끝에 들어간 이국적인 문양의 자수 덕에 화사해 보였고, 옷감도 가볍고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역시 의복을 갖춰 입으면 훨씬 더…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녀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곳의 옷을 안 입는 건 역시 마음에 안 들어서입니까?”
가끔 그런 양인들도 있었다. 신념이나 종교상의 이유로 절대 이곳의 의복을 입지 않는 사람들. 이 자도 그런가?
질문을 들은 헤바론은 민망한 듯 턱을 쓸었다. 솔직히 말해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갖춰 입을 것이 많아 조금 성가시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게다가 중요한 자리에나 차려입으면 되지, 하고 편하게 생각한 것도 있었고. 어쨌든 옷에 대해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곳의 사람이 보기엔 좀 성의 없어 보였을 수도 있겠군.
그녀는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질문을 들은 그는 괜히 변명을 하게 되었다.
“평소 움직임이 많아서 긴 옷을 잘 안 입다 보니 익숙지가 않아서요.”
“하긴, 그렇게 가벼운 옷차림을 하다가 이것저것 챙겨 입으려면 성가시긴 하겠습니다.”
거의 정확히 속내를 짚어낸 이야기에 그는 약간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저런 군청색 옷감으로 도포를 지어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녀의 시선이 닿는 쪽에 옷감을 늘어놓고 파는 포목점이 보였다. 그가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여러 옷감들 중 그녀가 말한 색이 눈에 띄었다.
“그렇습니까?”
“예. 암녹색이나 보랏빛이 도는 회색도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저 색이 딱일 겁니다. 그리고 술띠는 머리색이랑 맞추면 은근한 멋이 있을 것이고요.”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금세 조잘거리는 그녀를 보며 그가 웃었다. 갓끈에는 호박이 달려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왜 웃습니까? 그는 의아해 하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답하며 다른 건 또 뭐가 어울리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
“누가 보면 세상 무너진 줄 알겠습니다?”
헤바론이 농담을 던지는데도 그녀의 축 처진 어깨가 펴지지를 않는 것을 보니 제법 상심한 모양이었다.
이거야 원, 진심으로 실망했나 본데.
그는 조금 전, 음식값을 치르려고 당당히 나선 그녀가 품을 더듬으며 당황하더니 - “어… 어? 어어어??” - 결국 침통한 목소리로 돈주머니가 없어졌다 하는 것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그때 본 그녀의 표정은 마치 제일 좋아하는 공이 물에 떠내려간 것을 알게 된 강아지 같았다.
그는 음식값을 치르고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신 미안하다고 하는 그녀를 챙겨 나오면서, 아까 그녀를 밀치고 갔던 놈들을 떠올렸다.
그놈들이 범인이겠지.
여전히 시무룩해 있는 그녀를 보다가 그는 툭 내뱉었다.
“애초에 얻어먹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아니, 왜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아가씨한테 밥 얻어먹기는 좀 그렇지요.”
“예…?”
그녀가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 표정을 본 헤바론이 피식 웃었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았군.
“어…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그야 뭐… 처음부터요?”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멍하니 듣고 있던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뭘요?”
“제 옷차림 말입니다!”
“그거야 사연이 있어서 입었겠거니 했지요. 그게 아니라면 좋아서 입는 것일 테고.”
그래도 그 수염은 좀 참으십쇼, 진짜 안 어울립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시원시원한 것도 정도가 있지, 여자가 남자 옷 입고 다니는데 뭐 이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여? 서양에서는 의외로 그게 평범한 건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한 그녀는 소매를 만지작거리다가 딱히 거창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하고 운을 뗐다.
“제가 오라버니가 셋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오라버니들이 배우는 걸 저에게도 똑같이 가르쳐주셨거든요.”
그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오빠들과 앉아 책장을 넘겼을 어린 그녀를 떠올려보았다.
그거 참 귀여웠겠는데.
“그래서 당연히 저도 크면 오라버니들하고 똑같은 옷을 입는 줄로만 알았는데, 몇 살 더 먹고 나니 오라버니들이 입는 옷이랑 제가 입어야 할 옷이 달라지더라 이겁니다.”
“그랬군요.”
“근데 사실 구분해서 입는 거지 못 입을 건 없잖습니까? 그래서 한번 슬쩍 입고 나왔는데 진짜 편한 겁니다! 동네 애들하고 공을 차도 여자애라고 안 끼워주는 것도 없고, 얌전하게 걸으라는 잔소리도 안 듣고!”
킬킬 웃은 그가 말했다.
“게다가 나무도 타려면 남자 옷이 훨씬 편하겠지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치마 입고 나무를 타면 치맛자락이 성치 않더군요.”
아이구, 이미 시도해 봤습니까? 하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덕분에 어머니께 자주 혼났었지요, 하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이렇게 외유를 나올 때는 남자 옷이 편해서 이리 입고 나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공께서는 그렇게 셈에 허술해서 어쩝니까? 제가 오늘 대접하겠다고 한건 일전에 도움을 받아서인데요! 상대가 여자건 남자건 신세 갚는 건 받아야지요!”
그녀가 쫑알거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자 헤바론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예에, 제가 잘못했군요. 하고 대답했다. 그 웃음 섞인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이크, 하고 몸을 움츠리는 통에 그녀 역시 금세 웃음이 터지려 해 입술을 꾹 물었다.
어쨌든 그녀는 오늘 대접하기로 한 것도 실패했으니 다른 것으로라도 꼭 신세를 갚아야겠다고 우겼다. 한두 번의 사양과 그녀의 설득이 오고 간 끝에 -
“제가 도움을 받고도 은혜를 갚지 않은 걸 알면 어머니께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실 겁니다!”
“어머니께서 이 일을 알고 계십니까?”
“아뇨? 알면 여기 못 나왔지요.”
결국 그는 알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뺨을 긁적이던 헤바론은 문득 집에서 일하는 시종이 말해준 것을 떠올렸다.
“이틀 후에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면서요? 그럼 그때 구경시켜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혼담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이틀 후면 이맘때쯤 항상 열리는 꽃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날이라면 확실히 구경할 것도 많고 대접하기도 좋을 것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때야말로 제가 대접할 것이니 그때는 딴소리하기 없기입니다!”
*
이거 일이 재미있게 되어가는데?
그녀와 헤어진 후, 헤바론은 그녀가 또 아까 같은 무뢰배들을 만나게 될까 봐 멀찍이서 뒤를 밟았다. 그녀가 집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힘차게 걸어 당도한 곳은 자신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바로 자신과 혼담이 오고 가는 집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 나무 위에서 자신의 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 용감하고 씩씩한 아가씨는 동네에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기 남편감을 확인하러 왔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혼사가 결정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유명한 무관의 막내딸이라는 말에 혹시 무예라도 출중할까 하는 작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으나, 위로 오라비가 셋인 집의 막내로 태어나 곱게 자랐다는 말에 기대를 버렸다. 거기에 몸이 약해서 어릴 때부터 자주 몸져누웠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그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역시 그의 큰 체구가 상대에게 위압감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 색도 다른 사람들보다 튀는 탓에 더더욱 어찌 보일지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걸핏하면 쓰러지곤 했다는 아가씨가 자기를 보고 놀라서 쓰러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놀라서 쓰러지기는. 내가 내 약혼녀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본데.
혼자서 킬킬 웃던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멈칫했던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서야 자기가 혼담이 오가는 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역시 그건가?
그는 도성에 있을 때 정혼자끼리 더러 서로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며 어울리는 남녀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저 둘은 정혼한 사이인데 지금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그것을 설명해 주던 사람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야 집에서 정해준 사람과 혼인을 하더라도 서로 연애하는 기분을 내자 이거지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다 알고 만나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막상 본인이 그런 상황에 놓이자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가씨가 제법 대담한걸? 그렇다면 나도 장단을 맞춰줘야지.
***
보기완 다르게 제법 섬세한 사내란 말이지.
그녀는 품속에 넣어둔 손수건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투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제법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선뜻 도움을 준 일이나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배려심도 있는 사내였다. 처음에 외양만 보고 반사적으로 어디 산채에서 두목 소리 들어도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와서는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가끔 자신을 보고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은 얄밉기도 했으나, 자신도 그 앞에서는 유치하게 굴었으니 그것은 피장파장이고.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개구진 표정으로 웃을 때면 왠지 모르게 자신도 웃음이 터지려고 해서… 그때 가까이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건 의외의 모습이었다.
사내는 의복을 제대로 갖춘 모습이었다.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행전을 차고, 그날 지나가듯 말했던 군청색 옷감으로 만든 도포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주황색 술띠를 맵시 있게 맨 채였다.
양인들은 상투를 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더러 흑립은 생략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망건에 흑립까지 제대로 쓰고 있었다. 영 어색한지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차려입어 봤는데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건 또 언제 지었습니까? 이거 그날 본 그 옷감 맞지요?”
맞다마다요. 헤바론은 내심 웃었다.
그녀가 자신과 혼담이 오고 가는 상대라는 걸 알게 된 후, 그는 그녀가 그날 말했던 옷감으로 옷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로 그 옷감을 사며 도포를 지어달라고 주문을 넣었다. 하루 만에 지어달라는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던 포목점 주인은 혼담이 오가는 상대를 만날 때 입을 것이니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웃돈을 얹어주자 금세 비장한 표정이 되어 자신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했다.
역시 이런 일에 힘써주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지.
어제, 그가 완성된 도포를 찾으러 가자 포목점 주인은 옷이 잘 나왔다며 흐뭇한 표정으로 입는 법을 알려준다 어쩐다 수선을 피웠었다. 그녀의 안목이 정확했는지 적당히 광택이 도는 군청색 주단이 그에게 퍽 잘 어울려서 자신이 보기에도 제법 그럴싸했다.
이거, 그 아가씨 나한테 새삼 반하는 거 아니야?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입는 것을 거들어 주던 포목점 주인 부부가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이 모습을 보면 정혼자도 한눈에 반할 거라며 너스레를 떠는 통에 웃음이 터졌었다.
그는 자신의 차림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제법 이곳 사람 같습니까?”
그녀가 빽 소리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아니 이게 이렇게까지 잘 어울릴 일입니까? 하며 헤바론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그녀는 그에게 한번 돌아보라고까지 했다. 정말 별짓을 다 하게 되는군… 하면서도 그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번 휙 돌았다. 그 기세에 움직이기 편하라고 아래쪽에 트임을 넣어둔 도포자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감격스러운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제 안목… 제 보는 눈은 틀리지를 않습니다…”
자화자찬하는 그녀의 말에 헤바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든 말든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자태를 감상하던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그녀의 눈앞에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어어!!”
바로 그녀가 어제 잃어버렸다던 그 돈주머니였다. 그녀가 반가운 표정으로 주머니를 받아들며 물었다.
“이건 또 어떻게 찾아온 겁니까?”
“뭐… 그 사람들을 찾아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좀 했지요.”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헤바론을 쳐다보았다.
“그때 방에서 봤던 그 어마 무시한 무기의 이름이 대화인 것은 아니겠지요?”
“내가 그런 잔챙이들 상대하는데 무기까지 꺼내야 할 것 같습니까?”
헤바론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아 예, 그러시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찾아온 돈주머니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의외로 거의 그대로 있네요?”
“…담이 작은 놈들인지 가지고만 있더군요.”
그럴 리가 있나.
이미 다 써버렸는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걸 그가 채워둔 것이었다. 그는 얼마나 썼는지에 대해 그들과 좀 더 진솔한 대화를 나눴던 일을 떠올리다가, 이내 눈앞의 사람에게 집중했다. 아무래도 그냥 돈만 가져오면 안 믿을 것 같아 좀 귀찮은 방법을 택했는데, 이렇게 반가워하는 그녀를 보니 어제 그 골목을 쥐잡듯 뒤져서 저 주머니를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돈주머니까지 되찾은 그녀는 신나서 “오늘은 제가 다! 삽니다!” 하며 그를 잡아끌었고, 그는 괜히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끌려가 주었다.
*
본래 그녀가 지난번에 그와 함께 가려던 곳은 이 근방에서 음식을 제일 잘하기로 유명하여 양반네들도 곧잘 드나들곤 하는 음식점이었다. 그곳은 신분을 가려 받지는 않았으나 차림새를 보고 손님을 가려 받기로 유명하였는데, 웬일로 그가 아주 멀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신났는데 잃어버린 돈주머니까지 찾은 그녀는 한층 더 신나서 그를 이끌고 그곳으로 직행하여 이것저것 시켜댔다. 지난번에도 잘 먹던 사내는 여기서도 아주 잘 먹어서, 그녀는 그저 흐뭇했다.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채운 후 나선 길거리에는 축제날이라고 평소보다 더 많은 좌판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런 날은 온갖 곳에서 행상인들도 오고, 원래 이곳에 장사를 하던 점방들도 색다른 물건들을 만들어 내놓아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곤 했다. 그녀는 신나서 그를 이끌고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날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궁금해하는 것은 아는 대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이때만큼은 호기심 많은 스스로가 뿌듯했다. 쓸모없는 것에만 관심이 많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그녀였지만, 자신이 이런 걸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알고 있는 것도 없었을 것이고 그의 궁금증도 못 풀어주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그의 열렬한 반응도 그녀의 흥을 돋워주어 대화하는 것이 지루하지가 않았다. 대접도 제대로 했겠다, 안내도 잘 하고 있겠다, 그도 즐거워 보이겠다, 그녀는 오늘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사람 마음 다 똑같다니까.
지난번에는 그를 무슨 양 떼 사이에 낀 늑대 보듯이 보더니, 저렇게 입혀두니 다들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녀는 내심 뿌듯한 마음으로 그에게 꽂히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관망했다.
누가 골라줬는지… 역시 잘 어울리단 말이지.
딱 맞게 만들어진 의복이 그의 몸 위에서 유려한 선을 그렸다. 원래도 듬직한 몸은 더 듬직해 보였고,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장대한 기골이 돋보였다. 뼈대가 너무 굵으면 옷이 잘 안 어울려서 흉하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예외인듯했다.
저 봐, 다른 여인들도 다들 홀린 듯이… 음?
주변을 돌아보니 그를 흘끔흘끔 보는 여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문득, 그와 함께 있는 제 모습이 좋게 봐줘도 친우, 대강 보면 남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일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차피 내가 여자라는 것도 아는데… 오늘은 나도 단장을 하고 나올 걸 그랬나…?
하지만 치마를 입고 나왔으면 이렇게 편하게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들떠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기분이 약간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
봄을 맞이하는 축제답게 제법 많은 청춘 남녀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헤바론이 말했다.
“유독 짝지어 나온 남녀들이 많군요.”
“아무래도 핑계가 좋지 않습니까, 축제니까요.”
하기야, 그래서 자신과 요 아가씨도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께서도 아직 혼인 전이라 하셨지요?”
그녀의 질문에 멈칫한 헤바론이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모르는척하는 것이 아주 수준급이신데.
“예, 나이가 있으니 곧 할 테지만요.”
“아하.”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를 흘끔 보다가, 지나가는 질문처럼 물었다.
“그… 배우자가 어땠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는 건 없습니까?”
아, 맞다. 내 혼담.
그녀는 요 며칠 일어난 일들 덕에 혼담에 관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질문을 듣자 갑자기 현실감이 훅 밀려들었다.
“뭐… 저도 다들 바라는 걸 바라지요.”
그녀는 목소리를 한번 가다듬었다.
“품행이 단정했으면 좋겠다던가, 서로를 존중했으면 좋겠다던가… 저희 아버지가 어머니와 사이가 아주 좋으신데, 그걸 보면서 아버지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겠다고 말하곤 했었습니다.”
그야 거기서 그녀에게 제일 중요한 부분은 ‘아버지처럼 잘생긴 사내’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날 봤던 - 아마도 제 신랑감일 것이 분명한 - 아름다운 사내를 떠올렸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덜그럭거렸다.
그들은 길거리를 거닐다가 한 좌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유독 눈에 띄는 노리개를 손끝으로 쓸다가 그를 흘끔 쳐다봤다. 아까부터 왜 종종 답답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아까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었나, 아니면 오랜만에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한가? 속으로 의아해하던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공께서는요? 혼인할 분에게 바라는 게 있습니까?”
흠, 하며 그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먼저 물었으니 예의상 물어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왠지 입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글쎄요. 바라는 게 있다면 우선 건강했으면 좋겠군요.”
“건강 중요하지요. 후사도 봐야 할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이왕이면 평생 함께 하기로 했으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그의 옆에 서 있을 누군가를 상상했다. 이유 없이 마음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상대도 저랑 있는 것이 즐거웠으면 좋겠군요.”
그는 은근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눈빛으로 의미가 통하는 일은 없었다.
“...공의 부인되실 분은 좋겠네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그가 밝게 미소 지으며 “그렇습니까? 그거 참 다행이군요.” 하는 바람에 그녀의 기분은 더 진창에 처박혔다.
어쨌든 그녀의 기분과는 다르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산등성이에 걸려있던 해가 벌써 슬슬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꽃축제는 밤에도 이어진다 들었지만 헤바론은 그녀를 너무 늦은 시간까지 붙잡아 둘 생각은 없었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입니다.”
그녀 역시 밤의 축제도 제법 볼만한데,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어 분명 분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기분이 가라앉아서 슬슬 쉬고 싶기도 했다.
헤바론이 사람이 많으니 근처까지 바래다주겠다 주장하는 통에 그녀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함께 구경했던 것들에 대해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걷던 그녀는 골목 어귀에서 이쯤이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뭔가를 불쑥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선물입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민망한 듯이 웃었다.
“오늘 좋은 구경시켜줬지 않습니까? 그 답례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연청색 비단에 싼 무언가를 건네준 그는, 그럼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그녀는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에 든 것을 풀어보았다. 그 안에는 아까 유독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던 노리개가 들어있었다.
***
“아.. 망했다.”
옆에서 실을 골라주던 분이가 놀라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수를 놓던 것을 밀어두고 옆으로 누워버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분이가 자수틀을 들여다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예쁘기만 한데요, 아가씨! 하나도 안 이상해요!”
그야 그렇겠지. 내가 지금 망했다고 한건 그게 아니니까.
그녀는 분이에게 나가봐도 좋다고 하며 아예 드러누워버렸다. 그녀의 눈치를 보던 분이까지 나가자 방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요 며칠 습관처럼 달고 있던 노리개를 떼어냈다.
황색에 연한 갈색이 번진듯한 이름 모를 돌에 햇빛이 아롱졌다. 햇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은은하게 녹색이 감돌기도 했다. 그것을 한참 보던 그녀는 노리개에 달린 주황색 술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날 왜 유독 이 노리개가 탐이 났는지 깨달았다. 아마 그건 그가 짓던 표정, 그날 그가 입은 옷자락이 흩날리던 장면 같은 게 자꾸 떠오르는 이유와 같은 것이겠지.
그 깨달음 이후, 그녀는 오랜만에 앓아누웠다.
열이 올라 잠이 설핏 들었다 깼다 했다. 중간에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표정이나, 아버지가 의원을 붙들고 질문하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몇 번 마신 탕약이 효과를 보는지 조금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서늘한 손이 이마에 와서 닿았다.
슬며시 눈을 떠 옆을 바라보니, 아버지의 아름다운 얼굴을 제일 많이 닮은 둘째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또 아프냐.”
그는 아직 열이 남은 동생의 볼을 조물락거리며 말했다.
“너와 혼담이 오고 가는 자가 방문하기로 했었는데 네가 아프다고 아버지가 약속을 미루셨다.”
그녀는 그 말을 듣자 괜스레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그녀의 반응에 둘째 오라버니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결혼하기 싫어서 그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씀드려라. 아버지가 억지로 혼인하라 하실 분은 아니지 않니.”
그녀도 그의 아버지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어떤지는 알고 있었다. 과년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혼사 소식이 없자 다들 뒤에서 뭐라고 했는지도.
- 그 집 아들들은 다 멀쩡한데 막내가 좀 천방지축이라지.
- 어디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어?
물론 부모님은 그런 말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들이 신경 쓰였다. 완벽한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만 큰 흠을 안고 있는 듯한 기분은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혼사가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안심했다. 아무리 별나다고 해도 나도 남들 하는 건 다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정해진 혼처를 또 걷어차고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든다고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그녀가 대답 없이 훌쩍거리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시집 못 가면 뭐 어떠냐. 오라비랑 살면 되지.”
“일 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일하면 좋지 뭘 그러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심심해서 죽을 거면서.”
듣고 보니 맞는 말인지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공부한 거 놀리면 뭐 하니, 우리 공부할 때 같이 한거 아깝지 않니. 나지막이 떠들던 그가 동생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하고 싶던 하기 싫던... 우선 이야기라도 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는 본인의 경험을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내 갓은 그만 좀 쓰고 다녀라... 네 거 따로 사다 줄 테니.”
그가 남아나는 갓이 없다, 하고 투덜거렸지만, 그렇지만 그게 제일 예쁜데... 하고 웅얼거리는 동생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그녀는 사흘을 내리 앓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혼몽한 와중에도 자꾸만 그 주황색 머리 사내가 생각났다. 역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봐야겠다 결심했다.
오랜만에 방을 나서는데 집이 어쩐지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종종거리며 지나가는 어린 종을 불러 세웠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니?”
“예, 아씨. 주인어른께서는 사랑채에 계셔요.”
“그래, 그런데 오늘 무슨 일 있니? 어째 다들 바빠 보여.”
“아, 그것이…”
그때 다른 종이 다가왔다.
“아씨, 주인어른께서 건너오라 하십니다.”
마침 아버지를 뵈러 가려던 것이기는 한데… 그녀는 종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혹시 아버지가 무슨 일인지도 말씀하셨니?”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른 종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네! 아씨 정혼자가 방문했다고 하셨어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
사실 그 축제날로부터 이틀 후, 그는 그녀의 집에 괜찮으시면 한 번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의 전갈을 보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딸아이가 아파서 일정을 좀 미뤘으면 한다는 답이었다.
아프다고?
그는 그날 쌩쌩하게 돌아다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집에 갈 무렵에는 그녀의 낯빛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그날 바깥바람을 너무 오래 쐬었나?
그는 그 답을 받고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건지 알길은 없고, 허락도 없는데 무턱대고 방문할 수도 없고. 이곳의 예법은 모르는척하고 병문안을 핑계로 무작정 가봐야 하나 고민하던 즈음, 겨우 전갈이 왔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빠른 시일 내로 가겠노라 답을 보냈다.
*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가 내 막내딸이오. 얘야, 인사드리거라. 너와 혼담이 오가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왜 저 사내가 앉아 있지? 그날 봤던 그 화려하게 생긴 사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짐짓 얌전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오늘 아버지께 말씀드릴 작정이었으니 잘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상대를 착각한 주제에 다른 사내까지 마음에 품어 놓고는 뻔뻔하네!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이었는데 뭐가 어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반응이 의아했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저 씩씩한 아가씨가 오늘 천연덕스럽게 나와서 배시시 웃으면, 아니 당신이 제 혼인 상대였단 말입니까? 하고 놀라주는 상황이었다. 그의 고민은 사실 다 알고 있었다는 걸 언제쯤 말하는 게 좋을까 정도였는데.
그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한 그녀의 얼굴에 당신이 여기 왜?라는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개를 받고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슬슬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녀가 자기 남편감 얼굴이 궁금해서 그날 구경하러 왔던 건 맞지만, 사실은 결혼할 상대에 대해서는 전혀 전해 듣지 못했던 거라면? 그는 문득, 그 집에 자신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배웅해 주고 오라고 하는 통에, 그녀는 어색한 기분으로 그와 함께 마당을 가로질렀다. 왠지 오늘은 그도 장난스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니 이 사람도 갑자기 날 마주쳐서 당황스러운가 봐.
그녀는 말이 없는 그를 흘끔 보고는 생각했다.
그래, 괜한 말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우선 모르는 척을…
“혹시, 아가씨와 혼인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이 제 동료라고 생각했던 겁니까?”
…모르는 척을 해야 하는 건데.
헤바론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허망한 표정을 보고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웃어버렸다.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은, 거짓말을 조금도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
나는 아무래도 어디가 모자란가 봐.
그가 한 질문에 자신이 아무 대답도 못하고 안절부절하자 그는 쓰게 웃으며 “우선… 알겠습니다.” 하고는 돌아갔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녀는 방에 누운 채 발을 버둥거렸다. 왜! 아니라고 말을 못 해! 뭘 얼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있어! 그게 아니라고 했어야지!! 그녀는 방 밖에 들릴까 봐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질렀다.
그 역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까는 길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인사만 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그는 왠지 김이 샜다.
하긴. 정혼자 앞에서 하는 행동이라기엔 마냥 발랄하긴 했지…
하지만 그것 역시 그녀의 성격이겠지 싶어 그저 귀엽게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분명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을 소개해 줄 때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가 정 싫다고 하면 이 혼처는 우슬린에게 소개해 주고 자신은 다른 혼처를 찾아도 되는 일이었다. 꼭 그녀가 아니어도...
아니어도 되나?
그는 그녀의 말간 얼굴과, 재잘거리던 목소리, 자기가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반짝이며 즐거워하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렸다. 상대에게 착오가 있었다면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그녀는 간밤에 계속했던 고민으로 거의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 솔직히 지금 기분으로는 밤에 그의 집 담을 넘어서라도 그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튀어나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자신의 옷차림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또 남자 옷을 입기는 좀 그렇지? 그래도 정혼자인데 말이야.
막상 작정하고 단장하려니 아무리 찾아도 마음에 쏙 드는 옷이 없어서 뒤적거리기를 한참, 오늘따라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풀었다 다시 묶기를 또 한참, 연지가 너무 진하게 발린 것 같아 지우고 다시 바르는데 또 한참의 시간을 쓰고 나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타협하고 나서는데 요 며칠 코빼기도 안 보이던 셋째 오라버니가 둘째 오라버니와 함께 안채의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를 발견한 셋째 오라버니가 후다닥 달려왔다.
“아버지가 무슨 산적 같은 양인을 네 신랑감으로 데려왔다던데 그게 사실이야?”
그녀는 오랜만에 본 오라버니의 거친 언사에 입을 떡 벌렸다.
“그 사람이 뭐가 산적 같아! 그냥 수염이 좀 풍성하고 덩치가 큰 것뿐이잖아!!”
“소문으로는 이미 몇 명 때려눕혔다던데!”
“그거 아니야! 사정이 있었다고!”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둘째 오라버니가 입을 열었다.
"너 그러면 혼인하기 싫다고 울었던 게 그 사람 때문이야?"
어… 혼인하기 싫어서 운 것도 맞고 그 사람 때문인 것도 맞긴 한데… 그게 좀 다른데. 설명하려니 갑자기 낯 뜨거워지는 기분에 잠시 입을 다문 사이,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셋째 오라버니가 추궁했다.
“너 울었어? 그 산적 같은 놈하고 혼인해야 한다 해서?”
“오라버니는 모르면 조용히 좀 해! 그거 아니야!”
“진짜 시집가기 싫어서 운 거야?”
“맞긴 한데… 아무튼 그게 아니야. 나중에 말해줄게, 나 지금 가봐야…”
“어딜 가는데! 너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앓아누울 정도로 싫으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야지!”
“그러니까 갔다 와서 말해준다고…”
“아버지도 진짜 너무하시네, 우리 막내가 사내 얼굴에 얼마나 진심인지 아시면서!”
“너 지금 나갈 때가 아니다. 우선 우리랑 이야기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녀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 없던 일로 하자고 전갈이라도 오면 어쩔 건데?
“이야기는 내가 지금 오라버니들하고 할 게 아니라 그 사람하고 해야 한다고!”
“네가 가서 뭔 이야기를 해! 산적같이 생겨서는 생긴 것만큼 난폭한 자라던데!!”
“그래, 정 안되면 내가… 우선은 며칠만 더 아픈 척을 하자, 막내야.”
자신을 붙잡고 양쪽에서 시끄럽게 구는 오라버니들에게 짜증이 확 치솟은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거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지금 좋아하는 쪽이 그쪽이라고!! 오라버니가 자꾸 산적 같다고 하는 그 사람!!”
갓 태어난 새끼 제비들 만큼 빽빽거리던 두 오라버니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그녀는 이제야 좀 만족스러워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이제 알아들었지? 나 지금 바쁘니까 나머지는 나중에...”
두 사람의 충격 어린 시선이 자신을 미묘하게 비껴나갔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다가, 그들이 보고 있는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와 미묘한 표정의 헤바론이 서 있었다.
*
그녀는 진심으로 지금 자기가 여기서 갑자기 숨을 멈춰도 놀랄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들었겠지? 분명 들었을 거야. 평소에 어머니가 목소리 좀 작게 하라고 할 때 말 들을걸!
그 난리 통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미소 지은 어머니는 정혼자가 방문했으니 둘째가 동석한다면 차 한잔 정도는 마셔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얼쩡거리는 셋째 오라버니를 끌고 나갔다. 다만 그녀는 너무 당황한 터라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고, 말이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몇 번 헛기침을 한 둘째 오라버니가 입을 열려는데, 이번엔 분이가 급히 뛰어 들어와 둘째 오라버니를 찾았다.
“도련님, 친우 분께서 찾아오셨는데 엄청 급한 일이라고…!”
어머니의 당부 때문에 그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망설이지, 분이가 “그럼 도련님 오실 때까지 제가 있을게요!”라고 말하며 그를 떠밀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분이에게 세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말라고 다짐한 후 문을 나섰다.
그녀는 둘째 오라버니의 뒤에서 그녀를 향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분이를 보고는 직감했다. 지금이 아니면 자세한 상황을 말할 기회는 더 먼 훗날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서둘러 헤바론의 소매를 붙들고 담장 근처의 큰 나무 아래로 그를 이끌었다. 오늘 그는 보랏빛이 도는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역시 아주 잘 어울렸다.
내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해서 입은 게 맞을까? 그럼 혹시 그도 내가…
그녀는 그를 답삭 끌고 와 놓고도 한참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제가 처음에는 그분을 제 정혼자라고 생각했던 게 맞긴 해요…”
그게, 아버지가 꼭 잘생긴 사람을 남편감으로 찾아주겠다고 하셨거든요. 변명처럼 웅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헤바론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기는 했는데... 저희가 함께 시간도 보내고 대화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그게 너무 즐거워서...”
그녀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이와 혼인을 하는 건 아니다 싶어서 그날 아버지께 말씀드리려고 했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연모하는 건 당신이에요.
그녀는 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는 항상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던 평소와는 달리, 겨우 제 가슴께에 시선을 두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옷차림이 달라져서인지, 흑립 속으로 틀어 올려 숨기던 머리를 땋아내려서인지, 어째 오늘따라 유독… 헤바론은 왠지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사실은… 착오가 있었던 거면 혼사를 진행은 시키되 상대만 바꾸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든 그녀의 표정에 충격이 깃드는 걸 보며 헤바론이 빠르게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렇게 생각만 했단 겁니다. 그런데 사실 저도... 그러고 싶지가 않더군요.”
그가 자신의 옷깃을 잡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래서… 제가 끔찍하게 싫은 게 아니라면 혼인 날짜를 좀 미루더라도 저랑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자고 할 생각이었지요.”
“끔찍하다니요! 저는 전혀…!”
그녀의 다급한 말에 헤바론이 씩 웃었다.
“아무래도 제가 밤새 괜한 고민을 했나 보군요.”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봤다. 팔랑거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가만히 보던 그가 멋쩍게 웃었다.
“이곳의 방식으로도 하긴 할 거지만…”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가, 입술을 다시 꼭 물었다가, 이내 벅찬 표정으로 그의 손을 꼭 마주 잡고는 네, 하고 답했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며 그 역시 씩 웃었다.
++++
“…저 부부는 왜 저러고 있답니까?”
가벨이 별 희한한 것을 다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말에 창밖을 흘끗 본 우슬린이 미간을 한번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나?”
창밖에서는 헤바론이 자신의 부인을 어깨에 앉히고는 정원의 나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이상한 짓인지…”
“니르타 부인께서 니르타 경이 자길 어깨에 앉힐 수 있는지 없는지 친구분과 내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헤바론의 부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분명 결혼하기 싫다고 엄청 투덜거렸던 것 같은데… 아주 행복해 보이는데요.”
가벨이 다소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우슬린 역시 동감이었다. 오죽하면 결혼만 하고 밖으로 나돌아서 멀쩡한 아가씨 속을 썩이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는데…
혼례를 올리던 날 본 그녀는 상당히 여려 보여서, 그는 헤바론이 꽤나 애를 먹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 그녀를 마주쳤을 때에도 첫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일을 겪기 전까지는.
그날은 어쩐 일로 그녀가 사랑채에 들어왔는데, 그때 마침 둘은 사소한 일에 의견이 갈려 언쟁 중이었다. 한참을 떠든 후에야 그녀가 있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면서, 그는 살벌한 분위기를 보고 그녀가 울음이라도 터뜨리는 게 아닌지 내심 걱정했다.
하지만 그와 헤바론이 험한 말들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녀는 이내 잘 알겠다는 듯이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어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두 분, 세상에 둘도 없는 친우신거군요?’
그 말을 듣고 드물게도 그는 말문이 막혔다.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묘한 표정으로 창밖의 부부가 희한한 짓을 하는 걸 구경하다가, 헤바론의 부인이 그의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기 시작하자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동시에 눈을 돌렸다. 가벨이 조용히 말했다.
“…창문 닫을까요.”
우슬린은 약간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날씨가 추워져서 저 둘이 정원에 나와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서류로 눈을 돌렸다. 겨울엔 더한 꼴을 보게 될 거란 걸 예상하지 못한 자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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