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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엘리엇 카론|로이

“반드시 찾아야 한다!! 마지막 남은 수인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보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절대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예!!”

 

 햇빛보다 밝은 빛을 내는 보름달이 뜬 밤, 그보다 환한 불빛들이 도성 뒤 백악산을 밝히고 있었다.

 

“수인은 붉은 눈에 은빛 털을 가지고 있다!

구미호로 예상되니 둔갑이나 홀림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군사들을 이끄는 갈색 머리의 남자는 부하들에게 당부를 남기고 자신도 산속 깊은 곳으로 몸을 옮겼다.

 

‘제길..벌써 내성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

 

 더운 날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혀 흘렀다.

 그가 주위를 살피며 더 깊은 곳으로 발을 내딛던 때였다.

 

“흑..”

 

 흐느끼는 소리에 그는 소리의 진원지로 발을 옮겼다.

 

“흑..엄마..나 무서워..엄마..”

 

 소리를 죽이고 다가간 그곳엔 댕기를 땋아 내린 여인이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이 시각, 이런 곳에 여인이라니..저자가 수인인 것인가..?!’

 

 야심한 산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에 그는 긴장하며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고요한 산을 울리자 놀란 여인이 뒤돌아보았다.

 

“거..거기..누구십니까..?”

“..아..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어영대장 엘리엇 카론이라 합니다.

낭자께선 이 야심한 밤에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아..저..저는..”

“이곳은 수인이 목격되어 위험합니다. 저와 함께 산에서 내려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엘리엇은 여인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아..저는..저는..”

 

 엘리엇이 점점 가까워지자 여인은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여기 이리 홀로 계셔선 아니 되십니다.

제가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곁에 가지 않겠으니, 제가 앞서는 길을 뒤 따라오시지요.”

“아..그런 것이 아니라..저는 이 산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산..말씀이십니까?”

“예..”

“허면 제가 거처하시는 곳까지 모셔도 실례가 아닐는지요?”

 

 엘리엇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낭자께서 앞장서시지요. 제가 뒤에서 호위하겠습니다.”

“고..고맙습니다..”

 

 둘은 조금 떨어져 산속 깊이 걸어 들어갔다.

 

‘이 산에 살고 있다니..이곳에 인가는 없을 터인데..역시 이 여인이..’

 

 엘리엇은 여인에 대해 더 알아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입을 열었다.

 

“어찌 이리 외진 곳에 살고 계십니까?”

“아..저는 이 산에서 태어났습니다..”

“허면 부모님과 함께 기거하시는지요?”

“아닙니다..두 분은..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제가 결례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아..아닙니다..”

“이곳에 혼자 기거하시는 것이 겁나지는 않으십니까?”

“조금..무섭기는 하지만..매번 다니던 길만 다니는지라..

혹여 이상한 점이 있다면 금방 알 수 있어 괜찮습니다..

또한..이곳이 아니면..지낼 곳이 없습니다..”

 여인의 말에 엘리엇은 잠시 생각하며 침묵했다.

 

'금방 알 수 있다라..곁에 두고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군..'

“낭자께서 괜찮으시다면 이 산을 내려가 제 사가에 머무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예?”

“말씀드렸듯 이곳은 위험합니다. 마지막 남은 수인이 두 시진 전 이곳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언제 낭자의 거처로 습격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마지막 남은..수인..”

“예..또 저에게는 낭자와 또래의 여동생도 있습니다.

밝은 아이이니 분명 낭자께 좋은 말벗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또한 머무시는 동안 제가 새로 지내실 안전한 거처도 찾아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엘리엇의 제안에 여인은 머뭇거리며 고민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폐가 아니 된다면..짐을 챙겨도 될는지요..”

“물론입니다.”

 

 엘리엇은 밝게 웃으며 여인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곧 인시이거늘 아직 찾지 못한 것이냐?!”

 

 엘리엇은 모여있는 병사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송구합니다. 헌데 그 여인은..”

“백악산에서 살던 분이시다. 지금 이곳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내가 모셔왔다.”

 

 자신을 보는 눈길에 여인은 움츠리며 엘리엇의 뒤로 숨어들었다.

 

“머무실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밤색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엘리엇은 자신의 뒤로 숨어 떨고 있는 여인을 가볍게 감싸며 대답했다.

 

“됐다. 나와 함께 갈 것이다.

곧 인시이니 이제 수인을 찾는 것은 무리겠군.

너희들은 산을 철저히 봉쇄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샅샅이 수색도록 하라.

이 시각 이후, 이 산에서 수인뿐 아니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리바키온, 네게 지휘권을 넘기겠다.”

“예, 맡겨주십시오.”

.

.

.

“도련님 오셨습니까.”

 

 엘리엇이 사가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며 시종들이 인사해왔다.

 

“그래, 이분이 묵을 곳을 안내해드리거라.”

“이분은..”

“수인을 찾다 만났다. 부모를 여의고 홀로 지내고 있어 모셔왔으니 부족함 없이 모시거라.”

“예, 저를 따라오시지요.”

 

 저를 부르는 시종의 말에 여인이 머뭇거리며 엘리엇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엇은 부드럽게 웃으며 시선에 답하였다.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내십시오.

날이 밝으면 여동생과 함께 인사를 하러 가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편히 푹 쉬십시오.”

“고맙습니다..”

 

 여인은 쭈뼛거리며 앞장서는 시종을 따라 걸어갔다.

엘리엇은 그런 여인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지켜보다 제 방으로 향하였다.

 

“왔냐?”

 

 제 방인 양 누워있는 친우를 슬쩍 흘겨보곤 엘리엇은 무장을 풀었다.

 

“같이 온 여인은 누구냐? 귀엽던데?”

“이보게 니르타.”

“어.”

“내가 홀린 것 같은가?”

 

 연유를 알 수 없는 질문에 헤바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마지막 남은 수인을 찾으러 오른 산에서 만났다.”

“그래서?”

“구미호라지.”

“아~그 수인? 그래서? 저 여인이 구미호이고 네가 홀려서 예까지 같이 왔다 이 말이야?”

“….”

 

 엘리엇은 친우의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답을 망설이는 듯한 친우의 모습이 답답한지 헤바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미호라면 육식 수인 아닌가, 잡아야 마땅하지.

저 여인이 의심은 되지만 수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해 사가까지 데려온게지?

내 지금 자네의 행동은 옳다고 보네.”

“구미호는..추측일 뿐일세.”

“그래, 자네 말대로 추측일 뿐이지.

헌데 그것이 문제인가? 나라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면 그저 잡으면 될 일 아닌가.

그것이 수인이라면 더더욱 문제 될 것이 없지 않나.

게다가 마지막 남은 수인이니 육식이든 초식이든 잡으면 그만이지.”

“..불필요한 피를 보는 것은 원치 않네.

초식 수인은 해를 끼치지 않으니 부러 사냥할 필요 없지 않나..”

“카론. 자네는 저 여인이 수인이더라도 구미호, 육식 수인이 아니라 여기고 싶은 것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네..”

 

 두 친우 사이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헤바론의 가벼운 목소리에 흩어졌다.

 

“아~그래. 확실히 연유가 어찌 되었든 네가 사가에 여인을 데려온 것은 처음이지.

게다가 수인도 찾지 못하였는데 도중에 돌아왔다?

자네 단단히 홀렸구먼~저 여인이 구미호라는데 내 술 한 병을 걸지.”

 

 말을 마치며 낄낄 웃는 헤바론을 보곤 엘리엇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농을 하자는 것이 아닐세.”

 

 주름진 미간을 문지르며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엘리엇의 모습에 헤바론도 자리를 바로 하고 앉았다.

“흠.. 그래서? 어찌하고 싶은 겐가.”

“자네 눈엔 어떠한가. 내가 홀린 것 같은가?”

 

 친우의 말에 헤바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아닐세. 혹 그 여인의 눈이 붉던가?"

"아니었네."

"그 수인은 눈이 붉다 하지 않았나.  자네가 과민한 것 같구먼."

"허나 사람의 모습일 땐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골몰히 생각하는 엘리엇을 보던 헤바론은 시원스레 웃으며 어느새 둘 앞에 차려진 술상에 술을 한잔 털어 냈다.

 

“허허, 이보게. 자네가 정말 홀렸다면 이리 고민하지도 않지 않겠나.

너무 심려치 말게, 나도 신경써서 지켜보겠네.

혹여 자네가 홀리면 내 책임지고 정신 차리게 해주지! 약조함세!”

 

 호탕하게 웃으며 저를 향해 술잔을 드는 헤바론을 본 엘리엇은 환복을 마치고 마주 앉아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부탁하겠네.”

.

.

.

“안에 계십니까.”

 

 엘리엇의 부름에 여인이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와 마루에 섰다.

 

“나리 오셨습니까.”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나리 덕택에 편히 보냈습니다.”

 

 아침 인사를 건네던 여인은 엘리엇 옆에 선 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헌데 이분은..”

“아 말씀드렸던 제 동생입니다. 인사드리거라.”

“카론 가(家)의 고명딸 인사 올립니다.”

“아..말씀 낮춰주십시오..어찌 저 같은 천것에게..

나리께서도..말씀을 낮춰주십시요..

야밤에는..제가 경황이 없어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제 손님께 어찌 그러한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헌데 언제까지 저희를 이리 밖에 세워두실 겝니까.”

“아..송구합니다..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엘리엇의 말에 여인은 얼굴을 살포시 붉히며 옆으로 비켜섰다.

 

“하하, 농입니다. 조반을 들기엔 늦은 시간인지라 간단히 다과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시장하실 터인데 함께 하시지요.”

 

“아..예..”

 

 세 사람은 여인이 머무는 별채 뒤편, 연못가 정자에 자리했다.

 

“다과는 입에 맞으십니까?”

“예..과분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라버니, 오늘은 입궐하지 않으시나요?”

“낭자께 너를 보이고 입궐하려 하였다. 낭자와 네가 또래인 듯하니 머무시는 동안 잘해드리거라.”

“네! 헌데 제가 뭐라 불러드리면 좋을까요?”

 

 오누이가 대답을 기다리며 저를 바라보자 여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저는 이름이..없습니다..”

“아..”

 

 오누이는 평민 중 간혹 이름이 없는 이들이 있다곤 들었지만,

마주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당황하여 침묵하였다.

무거운 얼굴로 눈치를 보던 여인은 그들을 감싼 침묵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여 인사를 올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보다 먼저 엘리엇의 동생이 여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올해 나이가 어찌 되시나요? 소녀는 열일곱이어요.”

“..열아홉입니다..”

“아! 언니라 하면 되겠네요!!”

“예?..어찌 저 같은 이에게..”

“낭자, 그리 말씀치 마십시오. 낭자께선 제 손님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언니, 저희 잘 지내봐요! 저 정말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게다가 오라버니가 이렇게 대하시는 여인은 처음이라 정말 즐거운걸요.

드디어 소녀에게도 오라버니댁이 생기는 걸까요?”

“예???!!!!”

“이런, 괜한 소리 말거라.”

 

 엘리엇은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야! 오라버니는 어서 입궐이나 하시지요!!”

“녀석..낭자께선 고단하실 터이니 너무 장난치지 말거라.”

“알겠어요. 오라버니.”

 

 오누이는 마주 보며 환히 웃었다.

엘리엇은 동생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엘리엇이 떠나고 다과를 마친 둘은 연못가를 산책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홀로 지내며 무섭거나 외롭지 않았어요?”

“..외로웠지만..저는..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어요..

그리고..부모님 외에 다른 분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랬군요..허면 제가 언니의 첫 친우인 것이지요?”

“네? 친우요?”

“네, 친우요! 언니! 우리 친우가 된 기념으로 서로 화관 만들어 줄까요?”

 

 연못 옆 작은 들판으로 자신의 소매를 잡아끄는 소녀의 행동이 기꺼워

여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따라갔다.

 

"네..좋아요.."

 

 그의 말대로 그의 동생은 좋은 벗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양반가의 여식이니 받들어 모셔야 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부정이라도 하듯 그의 동생은 신분이 한참 낮은 자신을 거리낌 없이 대해주었다.

눈을 마주쳐 오며 맑게 웃는 모습부터 기품있는 몸짓까지 모든 것이 귀하고 큰 사람이었다.

 

'좋은 부모, 좋은 오라비..좋은 집, 큰 아량..모두 가졌구나..

나도..이런 집에서 태어났더라면..아니 적어도..평범한..'

"언니!"

 

 여인이 잡념에 빠져있던 사이 그의 동생이 어느새 완성한 화관을 머리 위에 얹어주었다.

 

“언니! 어쩜! 정말 예뻐요! 언니도 어서 제 것을 만들어주세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와 눈이 마주치자,

여인은 잠시나마 투기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네..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알록달록한 물이든 나무 아래, 그 곳에 두 소녀의 웃음소리가 바람과 함께 흘렀다.

.

.

.

“전하, 어영대장 드셨사옵니다.”

“들라 하여라.”

“전하, 옥체 만강하셨습니까.”

“….”

 

 어전에 앉아 턱을 괴고 느른하게 술잔을 들어 올리며 저를 바라보는 왕의 모습에, 엘리엇은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마지막 수인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여인을 만났다지.”

“..예..백악산에 홀로 기거하고 있어 사가로 데려왔습니다.

석연치 않아 곁에 두고 지켜보려 합니다.”

“그자가 수인이라는 것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확언을 올릴 수 없습니다.”

 

 왕은 엘리엇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오래도록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혹여 다른 뜻은 없는가?”

“감히 무엇을 감추겠나이까.”

 

 자신의 찜찜한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왕의 눈빛에 엘리엇은 등 뒤로 식은 땀을 흘렸다.

 

“짐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겠느냐.”

“다음..다음 보름엔 반드시 잡아내겠습니다.”

“다음.. 다음..마지막..마지막!!!! 이번이 몇 번째란 말이냐!!!!”

 

 왕은 언성을 높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집어 던졌다.

그 술잔은 엘리엇의 머리를 살짝 비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후…”

 

 왕은 자신을 달래 듯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육식 수인..아니 모든 수인을 증오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전하.”

“엘리엇 카론.”

“예, 신 여기 있습니다."

“필히 돌아오는 보름이 마지막 사냥이어야 할게야.

짐을 실망케 해서는 아니 될 것이네.

우리가 마주하는 오늘이 마지막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일세.”

“신, 목숨 바쳐 전하의 뜻을 받들 것입니다.”

.

.

.

 달이 어제보다 조금 기울어진 야심한 밤.

커다란 고목이 만든 그림자 속, 그곳에 두 사내의 인영이 겹쳐졌다.

 

“그 여인은 지켜보았는가.”

“예,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그렇군..리바키온, 네가 보기에 내가 이상한가?”

“전혀 아닙니다.”

 

 가로우의 답에 엘리엇은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하..새벽엔 어찌 되었느냐..”

“장군께서 돌아가시고 묘시까지 수색을 진행하였으나, 그 어떤 자취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시가 지나 사람의 모습으로 빠져나간 것인가..”

“허나..백악산에서 내려온 이는 장군과 함께한 여인이 유일무이하였습니다.”

“..그래..백악산은 여전히 봉쇄하고 있는가?”

“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엘리엇은 가로우의 답을 듣곤 나무에 등을 깊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전하께선 다음이 마지막 사냥이길 원하신다.

다음 보름까지 긴장을 놓치지 말고 샅샅이 수색하도록.

이 시각부터 내가 그 여인을 지켜볼 터이니 그동안의 통솔은 리바키온, 네게 맡기겠다.”

“예, 분부 따르겠습니다.”

.

.

.

“나리, 오셨습니까.”

 

 엘리엇이 귀가하자 시종들과 함께 여인이 마중을 나왔다.

 

“날이 아직 춥습니다. 안에 계시지 않고 어찌 나와계십니까.”

“나리께서 귀가하셨으니 응당 나와봐야지요.

저..주제넘지만..혹여 제가 도울 일은 없을는지요..

나리께선 제게 은인이시니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편히 계시면 됩니다. 혹 불편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저 모든 것이 과분합니다.”

 

 대답을 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엘리엇을 올려다본 여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리..어..어찌..”

 

 여인은 자신의 옷 소매를 잡아 쥐고 엘리엇의 이마를 두드렸다.

이미 굳어져 닦이지 않는 피를 닦아내려 여인은 엘리엇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갑작스런 여인의 행동에 엘리엇은 어찌 하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다치셨습니까?! 다른 곳은 괜찮으십니까?!”

‘다쳐? 내가? 아..술잔의 파편이 튄 것인가..’

 

 엘리엇은 움직이지 못하고 눈을 굴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 괜찮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정신을 차린 엘리엇은 한 발짝 물러서 여인과 거리를 두었다.

여인은 소매를 쥔 그대로 멈춰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그 눈길을 피하며 급히 이야기의 화제를 바꾸었다.

 

“아..내일부터 앞으로 낭자께서 기거하실 사가를 알아보려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둘러보시겠습니까.

낭자께서 지내실 곳이니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예..”

 

 엘리엇의 말에 그의 걱정으로 가득하던 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을 본 엘리엇이 당황하며 물었다.

 

“혹..저와 함께하시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아..아닙니다..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오래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닙니다..나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허면 내일 오시 즈음 모시러 가겠습니다.”

“예..”

 

 엘리엇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여인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이 머무는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곳에 오래 있을 순 없어.. 보름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해..

나리께 이 이상 폐를 끼칠 순 없는 노릇이야..’

 

 골몰히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 여인이 별채 앞에 당도한 그때,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나오는 노을빛 머리카락의 낯선 사내와 마주쳤다.

 

“누..누구십니까..”

“아, 저는 엘리엇 카론의 친우 헤바론 니르타라고 합니다.

낭자께서 제 친우가 모셔온 분이시군요.

인사를 드리고 싶어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아 이만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뵙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이리 만나게 되다니 하늘이 저를 도우시나 봅니다.”

 

 헤바론은 주인 없는 방에서 나온 일이 별거 아니라는 듯 허허 웃어넘기곤

가볍게 말을 건네며 여인에게 다가섰다.

 

“아..나리께서 귀가하셨다 하여 인사를 올리고 왔습니다.”

“그러십니까.”

 

 헤바론은 여인과 마주 서서 지긋이 내려보았다.

얼핏 보면 미소를 띠고 있어 상냥해 보였지만

무언가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에

여인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어 서둘러 자리를 뜨고자 하였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은혜를 갚고자 하십니까.”

 

 그런 여인의 발걸음을 헤바론이 잡아 세웠다.

 

“..물론입니다.”

“낭자께서는 하실 수 있으실 겝니다.”

 

“예?”

 

 알 수 없는 헤바론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헤바론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잊으셨습니까. 제 친우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소인 미천하여 높으신 분들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잘 생각해보시지요. 분명 낭자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을 겝니다.

날이 차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멍하니 서 있는 여인을 뒤로한 채 헤바론은 걸음을 옮겼다.

별채와 거리가 멀어지자 헤바론은 멈춰서 힘주어 쥐고 있었던 손을 펴보았다.

 

“은빛이라지..”

 

 헤바론의 손바닥에 놓인 은빛 털 하나가 달빛에 반짝였다.

.

.

.

“언니!!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어요!!”

 

 조반을 마치고 연못가를 거닐며 헤바론과의 만남을 떠올리던 여인 앞에 카론 가의 여식이 찾아왔다.

 

“아..예..날씨가 좋아 조금 거닐고 싶어서..”

“언니! 오늘 오라버니와 함께 출타하신다지요?!”

“예..그렇습니다..”

“예서 이리 계실 때가 아니어요! 어서 저를 따라오셔요!”

 

 여인의 대답에 여식은 환하게 웃으며 여인을 잡아끌었다.

 

“예?! 어디로..”

“단장을 해드릴게요!! 누구보다 어여쁘게!!”

“예?! 아닙니다..저는..괜찮습니다..”

“제가 괜찮지 않아요! 어서요!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여식은 막무가내로 여인을 잡아끌며 자신의 방으로 향하였다.

끌려들어 간 여식의 방바닥엔 오색빛깔의 치마와 저고리가 늘어져 있었고

경대 앞에는 분과 색색의 연지, 노리개들이 즐비했다.

 

“언니! 이리 와 보셔요.”

 

 여식은 여인을 방 한가운데에 세우고 저고리 몇 개를 들어 여인에게 대 보았다.

 

“어쩜! 언니는 피부가 맑아서 다 잘 어울리네요!”

 

 즐거워하는 여식과 달리 여인은 어쩔 줄 몰랐다.

 

“이..이것들은..”

“아! 전부 제 물건이에요. 새로 사드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요.

언니! 다음에는 저와 장에 가요. 재밌는 것들이 참 많아요.”

“아..감히 제가 어찌 이리 귀한 것들을..”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언니가 제 오라버니댁이 되어주시면 좋겠어요!”

“예?! 어찌 저따위가..”

“언니! 또 그런 말씀 하시면 저 정말 화낼 거에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무서운 얼굴을 하는 여식과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네..”

 

 여인은 마지못해 답하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흡족스럽다는 듯 여식은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우리 옷부터 갈아입을까요?”

.

.

.

“낭자께선 별채에 계시는가.”

 

 엘리엇은 시종을 불러 여인의 행방을 찾았다.

 

“아씨의 거처에 함께 계십니다.”

“그래..내 낭자를 모셔올 터이니 너희들은 채비하거라.”

“예.”

 

 엘리엇은 여인을 찾아 자신의 동생에게로 향했다.

 

‘잘 지내라고는 했지만 이리 잘 지낼 줄이야..’

 

 이유를 알 수 없는 술렁임에 엘리엇은 걸음을 바삐 했다.

 

“계십니까. 낭자, 모시러 왔습니다.”

 

 동생의 거처 앞에 당도한 엘리엇은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아, 오라버니! 오셨어요?!”

 

 여인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맞으러 나오리라 생각한 엘리엇은

보다 앞서 보이는 동생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금세 털어내고 여인을 찾았다.

 

“그래, 낭자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나리, 오셨습니까.”

“아.. ..예..”

 

 동생의 뒤를 이어 나온 여인은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채 다 들지 못하였다.

그런 여인의 모습을 본 엘리엇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라버니! 어때요? 정말 곱지요?!”

 

 그의 동생은 자신의 뒤에 있던 여인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내세웠다.

 

여인은 금실을 은은하게 수놓은 연한 노란 저고리에

그보다 조금 짙은 연분홍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옷고름에 달려 치마를 따라 떨어지는 금빛 매듭의 칠보 노리개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여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고운 옷감에 달린 하얀 동정 그사이에 자리한 뽀얗고 가는 목을 타고 시선을 올리면

동그란 얼굴에 가볍게 분을 올리고 입술엔 붉은 연지를 물들인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고 조금은 부끄러운지

여인은 양 볼에 홍조를 띠고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아..이 여인이..이리..’

“오라버니?!”

 

 순간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던 엘리엇은 동생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였다.

 

“어?! 불렀느냐?!”

 

 그의 동생은 허둥대는 오라비 모습에 포만감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가 보시기에도 언니 정말 곱지요?”

 

 엘리엇은 동생의 말에 여인을 다시 천천히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참으로 어여쁘구나.”

 

 엘리엇의 말에 여인의 홍조가 더욱더 짙어졌다.

.

.

.

“이곳은 어떠하십니까.”

 

 전날 약속한 대로 엘리엇과 여인은 도성 안 빈집들을 보고 있었다.

 

“예..좋습니다..”

“허면 이곳으로 하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세간살이는 제가 아랫사람들에게 채워놓으라 하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어려워 마시고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정말..정말..과분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치않습니다. 보답하고자 하신다면..”

 

 엘리엇이 고민하듯 가벼이 턱을 쓸다 여인과 마주 보았다.

 

“종종 제게 낭자의 어여쁜 얼굴을 보여주시면 보답이 되겠습니다.”

“..예..?”

“제가 드린 것들로 편히 지내시는 낭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해서..제가 낭자의 거처에 종종 들려도 실례가 아닐런지요?”

 

 엘리엇의 말에 여인은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물론입니다..

헌데..나리..제가 하나 여쭈어도 무례가 아닐는지요..”

 

 붉어진 얼굴의 여인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 여인을 물끄러미 내려보며 엘리엇은 미소 지었다.

 

“뭐든 괜찮습니다.”

“..나리께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요..”

“어허.. 방금 제 말은 듣지 못 하신 겝니까.”

“....”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낭자께서는 그저 잘 지내시면 됩니다.”

“....”

 

 고집스레 대답하지 않는 여인을 보던 엘리엇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것이라..”

 

 고심하는 듯한 엘리엇의 혼잣말에 그제야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엇이 여인과 눈을 맞춰왔다.

 

“저희가 어찌 만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예..나리께서 수인을 찾다가..”

“저는 이 나라의 어영대장이지요..지금 제게 주어진 가장 큰 일은 마지막 수인을 잡는 것입니다.

이런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아마 수인이겠지요.”

“아..”

 

 엘리엇의 대답에 여인은 떨리는 손을 꾹 잡아 눌렀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엘리엇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낭자께서 어찌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다음 보름까지 편히 지내시지요.

다음 보름, 꼭 수인을 잡아 낭자께서 걱정 없이 지내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예..”

.

.

.

 보름을 하루 앞둔 저녁, 엘리엇은 백악산 자락에 병사들을 소집하고 그 앞에 섰다.

 

“이곳에서 목격된 이후, 수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아직 백악산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내일은 기필코 잡아내야 한다!! 아니 우린 잡아낼 것이다!!”

“예!!”

 

 엘리엇은 병사들을 둘러보곤 내일 있을 마지막 사냥을 준비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부관이 다가왔다.

 

“아니었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엘리엇의 말에 가로우는 쉬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 모습에 엘리엇은 가볍게 한숨을 뱉어냈다.

 

“후..그래, 그 여인은..아닌 것 같다..”

“그렇습니까..”

“그래..아주 평범하더구나..”

“다행입니다.”

 

 가로우의 말에 엘리엇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여인에게 이리 마음을 쓰신 일이 처음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 아니라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그래도..다행입니다.”

 

 안도하는 듯한 가로우의 말에 엘리엇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다행이지..”

 

 눈을 감고 잠시 침묵하던 엘리엇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먼저 돌아가 보겠다.”

“예, 살펴 가십시오.”

.

.

.

 사가로 돌아온 엘리엇은 매일 마중을 나오던 여인을 찾았지만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간 항상 자신을 반겨주던 이가 없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지 않고 엘리엇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고작 보름 남짓한 시간일 터인데 이리도 정이 들었구나..

정말..아니어서..다행이다..

허나..내일..사냥이 잘 끝나면..정말 이곳에서 보내야 하겠지..’

 

 여인이 자신의 사가에서 떠난다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시큰해져 왔지만

엘리엇은 애써 그 통증을 모른척했다.

 

 감시라는 명목하에 함께한 시간은 길었고 그 시간은 평온하였으며 또 즐거웠다.

가끔 귀가 홧홧해지고 이유 없이 가슴이 욱씬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너무..오래 가까이 있던 탓이다..이 통증도 곧 괜찮아질게야..’

 

 자신을 다독이며 엘리엇은 내일 있을 거사를 준비하고 자리에 누웠다.

 

 날이 밝았지만 여인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 없었다.

별채로 찾아가 볼까 했지만 여인을 보면 가슴이 울렁일 것 같았다.

거사를 앞둔 날 괜히 술렁이고 싶지 않아 엘리엇은 별채로 향하고자 하는 자신의 걸음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달이 뜨려 할 즈음, 엘리엇은 백악산으로 향하기 위해 말에 올랐다.

 

“나리!!”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았던 여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이자 예상대로 가슴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엘리엇은 그런 가슴을 가볍게 문지르곤 말에서 내렸다.

그런 그의 앞에 여인이 가까이 다가섰다.

 

“나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잠시 귀를 빌려주시겠습니까?”

 

 여인의 말에 엘리엇은 몸을 숙여 자신의 오른쪽 귀를 내주었다.

 

“오늘 밤, 저와 만났던 그곳에 수인이 있을 겁니다.”

 

 귓속말을 들은 엘리엇은 놀란 눈을 하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꼭..잡으셔야 합니다..제가 나리께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반드시..잡으셔야 합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나중에..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을 피하는 여인에게 엘리엇은 순간 의구심 들었다.

 

“수인의 거처는 여태 아무도 알 수 없었는데..어찌하여 낭자께서 알고 계신겝니까.

낭자, 혹여 제게 숨기는 것이 있으신 겝니까.

허면 지금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낭자를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엘리엇의 말에 여인은 쉬이 대답치 못하고 시선을 자신의 발끝으로 돌렸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허나 나리..저를 믿으십니까.”

 

 저를 믿냐는 물음과 함께 여인이 눈을 맞춰오자 엘리엇은 순간 당황하였다.

여인의 눈은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흔들렸지만 올곶게 엘리엇을 보고 있었다.

그 눈 속의 뜻을 읽어보려 한참 바라보던 엘리엇은 수많은 물음을 자신의 속으로 삼켜 넣었다.

 

“알겠습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일이 끝난 후, 다녀와서 듣겠습니다.”

“예..나리..저를 믿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부디..무탈하셔야 합니다..꼭..건강하셔야 합니다.”

 

 무언가 마지막 말을 내뱉는 듯한 여인의 모습에 엘리엇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이 긴장한 탓이라 갑작스런 이야기를 들은 탓이라 생각하여 외면하고 다시 말에 올랐다.

 

“낭자..그럼..다녀오겠습니다.”

 

 처음으로 엘리엇이 먼저 건넨 인사였다.

항상 배웅과 마중을 받았지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처음이었다.

엘리엇은 왠지 가슴이 간질거려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자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빠르게 말을 달리면 소란스러운 가슴이 가라앉을까 했지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귀엣말을 건네던 여인의 숨결을 생각나게 해 엘리엇의 얼굴은 더욱더 붉게 달아올랐다.

 

.

.

.

“준비되었는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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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을 발견하면 바로 사살하라!! 보고는 그 후에 하여도 좋다!!”

 

 엘리엇은 병사들을 산 곳곳으로 배치 후, 여인과 만났던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었나..?’

 

 조금 헤매던 그때, 은빛 털 몇 가닥이 바람에 날려왔다.

 

‘이쪽이다..!’

 

 눈에 들어온 수인의 흔적에 엘리엇은 달아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발소리를 죽이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눈 앞을 가리는 나뭇가지 하나를 쳐내자 트인 시야로 완전하진 않지만 수인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수인은 꼭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려는 듯

환한 달빛을 맞으며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붉은 두 눈이 금방이라도 구슬픈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엘리엇은 그런 수인의 눈에 빠져들어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눈이 사가에 있을 여인을 떠오르게 해 가슴이 시큰해져 왔다.

 

 바람에 구름이 흘러 달을 살짝 가리자 수인의 눈이 빛을 잃었다.

다시 어두워지자 정신을 차린 엘리엇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주먹으로 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게 홀리는 것인가..이래선 아니 된다..

여인이 내게 준 귀한 기회를 놓칠 수는 없음이야..정신을 바로 해야 한다..’

 

 엘리엇은 정신을 가다듬고 화살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어두워..조금..조금만 밝으면..’

 

 수인에겐 야속한 바람이 불어 구름이 비켜 달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엘리엇은 달빛을 반사하는 붉은 눈을 과녁 삼아 당긴 활시위를 놓았다.

시위를 놓은 그 찰나의 순간, 엘리엇과 수인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마주친 수인은 왜인지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왜..?’

 

 무언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 그때, 수인이 가슴에 활을 맞고 쓰러졌다.

 

‘왜..피하지 않았지..? 분명 피할 수 있었는데..?’

 

 엘리엇은 소란스레 술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수인을 거두려 가까이 다가섰다.

 

“토끼..?”

 

 수인은 모두가 구미호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작고 약한 토끼의 모습이었다.

 

“하..토끼라면 이렇게 사살하지 않았어도 될..”

 

 조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며 엘리엇이 토끼를 안아 올리자

숨이 붙어있었는지 수인이 떨리는 손을 뻗어왔다.

파르르 떨리는 은빛 털이 보송보송한 작은 손이 그의 볼에 닿았다.

 

“경하드립니다..”

 

 수인은 미소를 띠며 엘리엇과 눈을 맞추곤 외마디를 남긴 채 힘없이 눈을 감았다.

 

“무슨..”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엘리엇의 가슴이 요동쳤다.

 

‘아니..아니야..아닐 거야..’

 

 엘리엇은 수인을 꼭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뛰어 산에서 내려왔다.

 

“잡으셨습..니..”

 

 엘리엇을 발견한 가로우가 그를 반기려다 처참한 그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말..말을 가져와라.”

“..무슨 일이십니까? 품에 있는 것은 수인입니까?”

“내 말이 들리지 않은 것이냐!! 말을 가져오라 하였다!!”

 

 오랜 시간 모셔온 상관이 처음으로 화를 내는 것을 본 가로우는 당황하여 순간 멈칫하였으나

금세 바로 하고 서둘러 그의 말을 가져다주었다.

엘리엇은 품에 은빛 토끼를 안은 채 말을 몰아 사가로 향했다.

 

‘있을 것이다..있어야 해..괜찮아..아닐 것이다..’

.

.

.

“도..도련님?”

 

 이 시간에 돌아올 리 없는 이가 돌아오자 시종들은 당황하며 엘리엇을 맞이하였다.

 

“수인은 잡으신 겁니까? 품에 그것은..?”

“비켜.”

“도련님 옷에 피가 흥건합니다. 우선 환복하시고..”

“비키라 하였다!!”

 

 자신을 따라오며 말을 건네는 시종을 거칠게 밀어낸 엘리엇은 별채로 달리듯 향했다.

불이 전부 꺼진 별채를 보며 엘리엇은 가슴에 안아 든 수인을 더욱 꼭 안아 들었다.

엘리엇은 마루 위로 신을 벗지도 않고 올라 여인이 머물고 있을 방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불렀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 엘리엇은 더욱 초조해졌다.

 

“안에..계십니까..”

 

 재차 불러도 대답이 없자 엘리엇은 더는 답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낭자 들어가겠습니다.”

 

 엘리엇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방은 텅 비어있었다.

 

“이..이곳일 터인데..왜..”

 

 텅 빈방 안을 본 엘리엇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도련님 서신을 놓고 간 것 같습니다.”

 

 엘리엇을 따라온 시종이 그가 정신을 놓은 사이

방바닥에 놓여있던 서신을 발견하여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엘리엇은 품에 안아 든 수인을 이불을 내려 그 위에 곱게 누이곤 서신을 받아들었다.

 

‘나리, 이 서신을 보실 즈음이면 원하시는 것을 얻으셨겠지요.

곁에서 경하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저를 용서하시어요.

저는 수인으로 태어나 단 한 순간도 두렵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항상 모든 것을 경계해야 했으며 조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원치 않음에도 보름이면 수인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참으로 끔찍하였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졌을 땐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지막 남은 수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이제 저만 없어지면 된다는 사실에, 저는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그런 저를 나리께서 구해주셨습니다.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고 웃어주셨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아닌 다른 이가 저를 보며 웃어준 것은.

 

나리,

나리와 함께한 보름은 참으로 따스하였고 행복하였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평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허나 한편으론 곧 끝날 이 나날이 무서웠습니다.

제가 수인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저를 경멸하듯 보실 나리가 참으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끝을 내려 합니다.

모두와 웃을 수 있고 나리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지금..가려 합니다.

나리와 만났던 그 날, 끝내려 했던 삶이기에 후회도 없습니다.

예정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이보다 더 좋은 끝은 없겠지요.

 

소원이 하나 있다면 다음 생엔 나리의 동생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저의 친우가 되어주었던 나리의 동생처럼 나리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그리 살고 싶습니다.

혹 그런 날이 온다면 이런 못난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제게 어여쁘다 하며 중히 여기며 이름도 지어주시겠습니까?

그리해주신다면 다음 생엔 이생에 못다 한 만큼 나리를 더욱 성심성의를 다해 모실 것입니다.

 

고된 삶이었지만 지친 여생이었지만

천한 제 마지막이 나리께 도움이 될 수 있어 아주 슬프지 않습니다.

나리와 만나 제 생이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리께서 제 마지막을 함께 해주실 터이니 두렵지 않습니다.

 

나리,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부디 행복하시어요.’

 

 여인이 남긴 편지를 본 엘리엇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한참을 서럽게 운 엘리엇은 무언가 결심한 듯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일어섰다.

손에 쥔 서신을 곱게 접어 품에 넣고 이불 위에 눕혀놓았던 수인, 여인을 안아 들고 말에 올랐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엘리엇은 부름을 듣지 못한 듯 그저 빠르게 말을 몰았다.

.

.

.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백악산으로 되돌아온 엘리엇에게 가로우가 다가섰다.

 

“사냥은 끝났다. 철수하라.”

“역시 그것이 수인입니까?”

 

 물건을 칭하듯 말하는 가로우에게 엘리엇이 날 선 시선을 던졌다.

 

“그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으니 태울 것이다.”

“예? 허나 전하께선 가죽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내가!! 내가 모두 책임질 것이다..”

 

 턱이 부서져라 힘을 주며 답한 엘리엇은 등을 돌려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십니까.”

“따라오지 마.”

 

 가로우는 처음 보는 상관의 모습에 당황하며 뒤따르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찌 된 일인지..”

.

.

.

 엘리엇은 여인이 부모와 살던 집을 찾아 산속을 헤메었다.

낯설고 험한 산길에 옷이 찢기고 얼굴이 긁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헤메이던 엘리엇은 간신히 여인의 집을 찾아냈다.

엘리엇은 마당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칼로 땅을 파내어 여인을 묻어주었다.

여인의 무덤 앞, 만신창이가 된 엘리엇은 그 앞에 주저앉아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작은 무덤 위를 도닥이며 쓸어내렸다.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낸 달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밝게 빛을 내며 무덤을 비추었다.

엘리엇은 그런 달빛을 따라 시선을 올려 둥근 달을 자조 섞인 얼굴로 올려보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곳에 묻어주는 것뿐이구나..

나는..고작 이것뿐이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내뱉은 엘리엇은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느리게 다시 읽어 내려갔다.

 

“어찌 이리하셨습니까..

마지막을 저와 함께해 두렵지 않으시다니요..

당신의 마지막을 제 손으로 거두게 하시다니..어찌 이리 잔인하실 수 있으십니까..

저는 이제 어찌 살아야 합니까..”

 

 여인이 남긴 마지막 서신이 눈물에 번지지 않게 하려 엘리엇은 이를 악물었다.

 

“어여쁘다 말해달라 하셨지요.

수천 번 수만 번 어여쁘다 해드리겠습니다.

중히 여겨달라셨지요.

세상 그 어떤 이보다 중히 여기며 귀히 대해드리겠습니다.

이름을 지어 달라 하셨지요.

누구나 부러워할 예쁜 이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허니 되려 제가 청하고 싶습니다.

다음 생에 꼭 이 못난 저의..동생으로 태어나주십시오.

주제넘은 마음을 품을 수 없게..감히 연모하지 못하게..

그렇게 평생 곁을 지키며 귀애 할 수 있게..꼭 그리해주십시오.

그리해주신다면 제 모든 것을 바쳐 지켜드리겠습니다.”

 

 엘리엇은 부서져라 턱에 힘을 주어 눈물을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굵은 눈물이 서신 위로 떨어져 번졌다.

그것을 본 엘리엇은 서신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으려 곱게 접어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러자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달이 큰 구름에 숨어 세상에 어둠을 흘렸다.

그 어둠에 숨어 엘리엇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얼굴로 마지막 말을 꺼냈다.

 

“제게 행복하라 하셨지요.

그 말은 약조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낭자께서 곁에 아니 계시는데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여, 이생에 제게 남은 모든 복을 다음 생으로 미뤄 두려 합니다.

다음 생에 이생에 미뤄둔 모든 복을 더하려 합니다.

허면 그 생은 이리 아플 일은 없을 테지요.

허니, 낭자..다음 생에 우리 꼭 다시 만나 같이 행복합시다..”

 

 바람이 많이 불고 보름달이 뜬 어느 가을날..많은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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