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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의 기묘한 모험

루스 세르벨|샤라제

“예로부터 어린 백성들에게 신묘한 힘으로 도움을 주는 인물들은 존재했으니,

부정부패에 빠진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어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니

양반들에게는 적이요 백성들에겐 수호자와 같더라.

그들은 한라부터 백두까지 땅을 접어 이동하매 산군(山君)과의 예를 지키니,

그 중 가장 유명한 자가 풍백의 선인 홍길동이요 화담선생의 제자 전우치라.

훗날 찰나의 시간을 그들의 곁에서 보내며 그들의 혼백에 은빛을 새기고 돌아간 도사가 존재하니,

홍길동이 그자의 이름을 루슬(鏤璱)이라 명하였다.”

 

 

모든 일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나설 때 새끼발가락을 다칠 수도 있고,

칼립스 성 내를 자유로이 다니는 고양이들이 독서를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니, 과로에 허덕이는 천재 미소년 마법사가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루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칼립스 성의 도서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책장 사이를 비추는 햇살을 누리며 양피지와, 가죽과 먼지가 얽혀 만들어내는 조금은 텁텁하지만 노곤해지는 향에 파묻혀 잠드는 삶! 연구자에게 있어서 이는 고문임과 동시에 심리적으로 크나큰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아닐까. 비록 자신의 눈앞에는 해결해야 하는 일이 즐비했으나, 근 일주일을 꼬박 연구에 매진한 루스에게 있어서 지금은 심신의 안정과 만족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이 눈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책상에 살포시 몸을 숙이고 자신을 잡아먹을 듯 달려오는 수마의 유혹에 기꺼이 동화되어가던 루스의 완벽한 시간은, 자신을 찾는 맥시밀리언 칼립스의 목소리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루스! 또 여, 여기서 잠든 거예요? 리프탄이 알면 도서관의 책들이 모두 아, 아나톨 국민에게 무상으로 저, 전달될 거예요! 루스의 탑에 이, 있는 것까지!”

“귀부인…. 저는 그 정도 협박에는 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제가 여기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할 때 바로 올 수 있지 않으십니까? 이는 필시 제가 도서관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칼립스 성의 모두가 인정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그거랑 이건 다른 이야기잖아요! 으으…!”

“그나저나, 저는 왜 찾으신 겁니까? 또 칼립스 경이 절 찾기라도 하나요?”

 맥은 그제야 자신이 루스를 찾아온 이유를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바, 방어 마법식에 대해서 알려준다고 해, 했잖아요. 술식은 스스로 학습이라고 루스가….”

“그러고 보니…. 그걸 잊고 있었군요.”

 루스는 맥의 대답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찾아온 수마를 떨쳐내는 것은 너무나도 아쉬웠으나, 지금 맥에게 마법식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단장인 리프탄 칼립스의 제지에 의해 유용한 인재를 활용할 기회를 뺏길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한시 바쁜 상황에, 인재가 있다면 시간이 허락할 때 함께 해야지.

“...지금 바로 시작하죠. 먼저 제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마법식을 바로 알려드릴 테니 계산은 귀부인 스스로 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루스는 눈앞의 양피지에 마법식을 휘갈기듯 적어 맥에게 건네고 마나를 이용해 손바닥 위에 마법진의 형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광역마법을 처음 계산할 땐 이렇게, 마법식 외에도 마법진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를 상기시키며 내 손 안에 마나를 이동시켜 마법진을 그리듯, 어?”

 손바닥 위에 마나를 모아 마법진을 설명하던 루스는, 이내 자신의 마나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내 마나는 마치 의지를 가진 듯, 루스의 머리 위에서 마법진을 그리더니 그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새하얀 빛을 내리쬐기 시작하였다.

“루스!?”

“....젠장.”

 꼬여버린 마나의 흐름은 방어마법진을 소환마법진으로 바꿔버렸고, 그렇게 루스는 작열하는 백광에 휩쓸리듯 자취를 감추었다.

- 1609년 8월, 조선 비망도(備忘島)

 새하얀 빛이 사그라들고, 주위의 어수선함에 눈을 뜬 루스는 자신이 성인 둘과 어린아이 한 명 앞에 주저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거참, 형님. 소환술에 능한 아이가 있는데도 끝까지 고집부리더니, 이게 뭐요? 괜한 청년만 소환되지 않았소!”

“우사 너는 그래서 문제인게야. 도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 않는 법! 환술에 능하지 않은 이는 백 밤을 연습하면 되는 것이고, 이에 능한 자는 다른 이를 도우며 배워나가는 것이지. 그것이 강림 도령이 우리에게 부탁한 일의 핵심 아니겠느냐? 대길아, 너는 최선을 다했다. 뒷일은 우리가 해결할 테니 들어가 쉬어라.”

“예. 정말 죄송합니다, 길동 형님.”

“어허. 정 미안하면 내일 아침에 마당이나 쓸어주련?”

“예! 제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길동이라고 불린 자는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루스에게 말을 건넸다.

“정신 산만했을 텐데 미안하오. 생김새나 복식으로 보아하니 서국에서 온 듯한데 한데, 우리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들으시겠소?”

 푸른색 두루마기에 망건을 두르고 있는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루스에게 말을 건넸다. 리프탄과 같은 풍채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는 뼈마디가 굵고 투박한 손을 내밀어 루스를 일으켜 세웠다. 루스는 그런 홍길동을 경계하면서도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예, 우선은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거 참 다행이군! 우사 네 녀석이 여기저기 붙이고 다닌 부적이 쓸모가 있었구먼! 처음 봤을 때는 네가 도술 쓰는 것에 무료함을 느껴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쓸모 있을 거라 했지 않소. 각설하고, 우선은 저 양반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우? 대길이 녀석이 소환하려던 건 전서구지, 아무리 술식이 틀어졌다 하더라도 인간을 소환할 능력도 되지 않고.”

“그렇지, 대길이 녀석에게 소환하라고 한 것은 호(虎) 선생이 선물해준 묘아자나무(호랑가시나무)의 열매였으니. 우선은 이쪽으로 오시게. 비록 사고로 찾아오긴 했어도 손님이시니!”

 루스는 그들이 말하는 사이에 두리번거리며 자신이 소환된 곳을 살펴보았다. 넓은 방 안을 장식하는 조그마한 가구들은 낯설었고,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자들의 외모 또한 자신의 주위사람들과는 달랐다. 비상한 머리는 이윽고 자신이 소환된 곳이 동양의 어딘가라는 결론을 지었다.

 홍길동은 두리번거리는 루스를 웃으며 바라보고는 그를 주전자가 놓인 개다리소반 쪽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개다리소반은 너른 상이 되었고 그 위를 형형색색의 다과가 장식하였다. 치자색 도포에 나비 모양 자수가 들어간 화려한 남자가 손짓하니 루스의 앞으로 수정과와 약과가 이동하였다.

“이곳은 조선의 비망도라고 하고, 나는 홍길동이라고 하오. 패기 어린 시절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천신님과 강림도령의 관용과 배려로 우사 녀석과 함께 이곳에서 단명한 아이들에게 도술을 가르치고 있지. 도술을 보고도 놀라는 기척이 없는 걸 보니 그대 역시 도술사인가 보오.”

“귀군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쪽에서는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루스 세르벨이라고 합니다. 렘드라곤 기사단의 마법사이자 웨던 왕국의 아나톨 소속이죠. 귀부인, 그러니까 아나톨의 영주 리프탄 칼립스 님의 부인, 맥시밀리언 칼립스 부인께 마법진에에 대해 알려드리던 과정 중, 마나의 흐름이 통제를 벗어나 여기로 소환되게 되었습니다.”

 차분히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과정을 밝힌 루스는 아차 싶어 둘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리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본인이 사용한 표현이 이 나라에서는 사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이곳에 오게 된 과정 자체는 이해했소. 아무래도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겠지. 서국은 이름이 길고 특이하구만. 왜단? 안하돌? 왜(倭)국과 연관이 있는 건가?

“웨던과 아나톨입니다.”

“특히 부인의 이름은 갈립소(喝粒訴) 부인이라니…. 깨알 같은 꾸짖음을 호소하실 정도로 두려운 분이신가 보오?”

“칼립스(chălybs) 부인입니다. 이름이 아닌 성이고요. 참고로 칼립스는 검(劍)을 뜻합니다.”

 비록 홍길동이 고유명사를 이상하게 이해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루스의 이야기를 이해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안도한 루스는 평소라면 입에도 대지 않을 낯선 음식을 관찰하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처음 맛본 수정과의 맛은 씁쓸하고도 달콤했다.

“미안하외다. 형님이 나이가 들어 서국의 언어도 한자로 치환하지 않으면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이지.”

“우사 네 놈은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게 재미지지?”

“그걸 이제 아셨소? 이만치 함께 했으면 진즉에 파악한 줄 알았소만.”

“아직도 파악할 것이 많이 남은 네놈이 매력적인 것이 잘못이다, 이놈아.”

 전우치와 홍길동은 긴 세월을 함께하였음에도 하루도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홍길동이 전우치의 일방적인 깐족거림을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인정해주니 좋구먼! 하하하!”

 전우치라 불린 남자는 만족한 듯 치자색 도포를 펄럭이고는 루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전우치요. 남들은 우사라고 부릅니다. 길동 형님이 말했듯 지은 죄가 커 함께 속죄 중이지. 형님은 주로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나는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아이의 혼(魂)을 찾아 여기로 데려오는 일을 하고 있소. 아무래도 형님과 내 죄의 무게가 달라서 그런지 고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

 전우치가 붉은 눈으로 루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청회색의 맑은 눈동자 속에는 그의 외견과는 달리 거친 풍파를 겪은 듯한 흐름이 보였다.

“그대의 혼은 보이는 것에 비해 세월의 풍파를 많이 겪었구먼. 조상 중에 인간이 아닌 분도 계신 것 같고.”

“그런 것도 보입니까?”

 

 익숙하지 못한 젓가락질로 매작과를 집으려다 포기한 루스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전우치에게 물었다. 역시 음식도 먹어 버릇하는 사람이나 먹는 거지. 전우치는 자신의 눈가를 쥘부채로 툭툭, 치더니 이내 부채를 펼쳐 바람을 일으켰다.

“악우(惡友)가 준 유일한 선물이라오. 혼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정도지,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헤아리지 못합디다. 나와 형님이 제아무리 신선의 도를 닦으며 수양한다고 해도 신선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우사 말대로요. 지식을 얻을 수는 있으나 선인(仙人)의 위치에는 오를 수 없지. 그렇기에 이렇게 평생을 죄인의 신분으로 속죄할 따름이고.”

 

 홍길동은 그리 말하며 루스 앞으로 온갖 간식을 밀어주었다. 다식, 약과, 화전, 유과 등 생전 처음 보는 음식에 휘둥그레진 루스는 조심스레 약과를 집어 들며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두 분의 이야기는 제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그런 것보다 어서 빨리 제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아나톨 유일의 천재 미소년 마법사인지라 할 일이 많거든요. 오, 이거 맛있네.”

 

 루스의 마지막 말에 홍길동은 박장대소하며 전우치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하하하! 내 평생 자신의 미모에 자아도취 하는 이는 많이 보았으나 그 정도가 우사 저 녀석을 넘는 자는 만나본 적이 없거늘, 오늘 그대의 발언이 내 여지껏 들은 우사의 자아도취보다 더 우습구먼그래! 안 그러냐, 우사야!”

 상 위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갓에 이어진 흑옥의 구슬 입영(笠纓; 갓끈)을 만지작거리던 전우치는 배를 잡고 웃는 홍길동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형님, 그것은 사실이지 않소? 내 살아생전부터 여태껏 전국 팔도를 돌아다녀도 나를 뛰어넘는 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 그렇다고 말한 것이지, 거짓을 고한 적은 없소. 그대 또한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쳐왔기에 그리 생각하고 하는 말 아니오?”

“맞습니다. 원정을 다녀도, 웨던 왕국을 둘러보아도 저와 같은 미소년은 찾을 수가 없더군요. 우사님의 표현대로 저처럼 아름답고 실력까지 출중한 인물은 그 어디에도 없었구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자신의 외모와 실력에 대해 칭찬을 이어갔고, 그 모습에 홍길동의 웃음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바닥을 치며 웃으니 그 힘에 바닥이 들썩이기까지 하였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길동 형님!!”

 심해지는 진동은 홍길동의 집을 넘어 온 섬을 뒤흔들었다. 이에 어린아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홍길동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벌게진 얼굴에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는 홍길동과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짓고 자화자찬 중인 두 사람을 보고, 이 일을 수습하기에는 자신들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여기서 말리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어지자, 대길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환술로 전서구를 소환했다.

“됐다! 구구야, 강림 차사님을 뫼셔오거라!”

 구구라 불린 비둘기는 날개를 푸드덕거리고는 구름 속으로 날아갔다.

 

 아이들은 초조한 시선으로 구구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거의 동시에 청람색의 전포(戰袍)와 전립(戰笠)을 갖춰 입은 강림 차사가 구름을 타고 비망도에 도착했다.

“차사님!!”

“차사님 무섭습니다!”

“차사님, 길동 형님 좀 말려주십시오!”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이들은 그의 도착에 제각기 목소리를 높여 지금 상황을 전달하고자 했다. 강림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괜찮다. 괜찮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거라. 아마 우사의 농에 넘어가 박장대소 중일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춘삼이 네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삼신할미 곁으로 가거라. 처음 겪어 본 아이들은 그곳에서 아직 울고 있을 테다. 가서 삼신할미께 강림도령이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드리렴.”

“아, 알겠습니다! 얘들아, 이동하자!”

 아이들을 보낸 후 강림은 한숨을 푹 쉬곤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누워있는 홍길동과, 뿌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악우(惡友)가 잿빛 머리칼의 이방인과 농을 견주고 있었다.

 강림은 자신이 꽤나 귀찮은 일에 얽히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대길이가 전서구까지 띄웠겠소. 우사 자네도 말일세, 의견이 맞는 자가 있다고 해도 홍길동의 행위에 대해 언질은 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정말 미안하오, 도령. 저들의 농이 너무도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농이 아닌 것을 농으로 치부하니 그런 것 아니오. 나는 잘못 없소.”

 전후 사정을 들은 강림은 다과상에 놓인 차를 한 입 마시곤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자신의 죄를 아는 홍길동은 머쓱한 웃음만을 짓고 있었고, 강림의 방문이 달갑지 않은 전우치는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변명을 던지고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방안에 놓인 장식품의 개수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강림은 머리가 아파져 오는 듯 전립을 벗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그대는 이곳의 존재가 아니라는 거군.”

“예. 돌아갈 방도를 찾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제가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네요. 마나의 흐름이 뒤틀려 소환진으로 변했으니, 이곳의 누군가가 소환진을 만들어 절 부르려고 한 것은 확실한데 말입니다.”

 루스는 눈앞의 다식을 세워 검지로 굴리며 자신의 가설을 강림에게 설명했다. 딱딱하고 동글동글한 것이 손을 놓으면 굴러갈 것 같았다.

“원리를 따진다면 그것이 맞겠군. 하지만 그대가 이를 바로 해결할 방도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고. 그리고, 먹을 것으로 장난치면 안 된다.”

“예예~.”

 루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강림의 시선에 다식에서 손을 뗐다.

“애초에, 마나가 제어되지 않는다는 상황은 평소라면 발생하지 않을만한 일입니다. 여기서 저를 소환한 것이 아니면 누군가가 저를 부르려고 했다는 건데, 이를 해결하려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 뒤져야 할 지도 모르겠군요.”

“다행히도 그 방법을 도울만한 일이 내게 있는 것 같군.”

 

 강림은 한쪽 입꼬리만을 올려 웃으며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금색 자수가 들어간 붉은 천에 감싸진 두루마기는 척 보기에도 높으신 분의 뜻이 담겼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두루마리를 묶고 있는 노란색 금줄을 두루마리에 둘둘 말더니 무심하게 툭, 하고 전우치에게 던져주었다.

“거, 매번 너무한 거 아니오? 말로 하면 되는 것을 꼭 이리 두루마리로 주고 그러시네.”

 바닥에 떨어지려는 두루마리를 낚아챈 전우치는 구시렁거리며 그 내용을 확인했다.

“염라청에서 그리 내려오는 것이니 불만은 대왕님께 하든지 하게. 이번 임무는 아무래도 그대를 도울 수 있음직한 내용이 나올 듯 하니. 우사 네가 책임지고 조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리고, 오늘도 자네 약식은 조선 제일이구먼. 가기 전에 또 부탁해도 되겠는가.”

“도령이라면 언제든지 가능하니 걱정하지 마시구려. 이미 도령이 왔을 때부터 초인(草人) 녀석들이 준비하고 있을 테요.”

 강림은 전우치의 불만 어린 이야기는 한 귀로 흘리고는 눈앞의 다과상에 집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루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제 이름은 그대가 아니라, ‘루스’입니다.”

“미안하네. 서국의 언어는 발음이 잘되지 않아서.”

“그리 어려운 발음도 아닌데 ‘그대’라느니, ‘당신’이라느니. 오히려 말하는 쪽에서 헷갈릴 것 같아 그러는 겁니다. 이건 뭐 부적으로 어찌 안 됩니까?”

 

 강림은 입 안에 넣던 유과를 내리며 미안한 표정으로 루스를 바라보았다. 조선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발음이라고는 하나, 그에게도 이름이 존재한다. 발음이 어렵다고 해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이들은 뒤늦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대 또한 여타 서국 출신들처럼 이름에 적합한 한자를 덧붙이는 것을 추천하네. 아무래도 그편이 우리에게도 편할 테고. 아무래도 길동 자네가 적임자인 듯 하네.”

“마침 딱 어울리는 단어가 떠올랐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모쪼록 오늘과 같은 일로 차사님을 다시 부르는 일 없도록 조심하도록 하겠소.”

 

 홍길동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루스에게 화전을 건넸다. 나름대로 사죄의 의미를 담은 듯한 몸짓에 루스는 표정을 풀고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진달래가 올려진 화전은 낯설지만 익숙한 맛을 내며 루스의 입 안에서 사라져갔다.

“제발 이런 일로 다시 찾아오지 않게 해주길 바라네. 삼신 어르신께도 사죄드리는 것 잊지 말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강림이 자신의 몫으로 준비되었던 다과상을 깔끔히 비우고 떠날 채비를 하였다. 이에 루스를 포함한 다른 이들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마당으로 나섰다. 작열하는 햇빛과 대비되는 강림의 스산한 모습은 비범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루-수, 그대가 이른 시일 내에 돌아갈 수 있길 바라네. 우사 녀석이 미덥지 않더라도 실력은 좋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야 당연하죠. 자신의 미모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 중에 실력이 없는 자들은 이미 전쟁통에서 죽었을 겁니다. 지금의 저와 우사님이 함께라면 하루빨리 아나톨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은 강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밖으로 나갔다.

“세상에…. 자아도취는 내 생에 우사 녀석 하나라고 생각했거늘, 만만치 않은 사람이 있었구나. 자네가 고생이 많을 것 같네.”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털어낸 강림은 대문을 나섬과 동시에 구름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모습에 루스는 그제야 자신의 의문을 표출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이에 루스의 옆에 서 있던 홍길동과 대청마루에 앉아 파리를 쫓듯 손짓하던 전우치가 연이어 말했다.

“저승의 차사님이시지. 염라대왕님이 직접 혼을 거둬들인 유능한 사람이네. 우리를 이곳에서 지내게 해준 이이기도 하고. 그에겐 항상 고맙고 미안하지. 여기에 오기 전에 저지른 죄를 조목조목 읊는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눈으로도 심한 욕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네. 하하하!”

“혼백으로 장난치면 당장에 만날 수 있는 작자. 관직에 올랐을 때, 상사들이 날 뭣같이 취급하더라고? 그때 골탕 먹인다고 부인들의 영혼만을 불러 연회를 열었지. 종국에는 강림 차사가 찾아와 직접 혼냈다네. 내 그때 이후로는 혼백을 분리해서 장난치거나 하지는 않는다우.”

 루스는 이들이 이야기를 듣고, 오늘 아침에 누워있는 자신의 등 위를 밟고 다니던 칼립스 성의 말괄량이 고양이 삼 남매는 장난 축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저승의 경호원이 출동할 정도의 죄라면 세상을 얼마나 뒤흔들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재간에 쓰러진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두 분은…. 그, 흔히 말하는 양아치였습니까?”

“하하하! 다 지나간 일 아니겠는가!”

“형님은 뭐, 초인(草人)부대로 왕을 농락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에 비하면 난 양반이지. 철없던 시절에 왕을 상대로 재밌게 놀지 않았소?”

 이제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라며 손을 휘휘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던 홍길동은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비아냥거리는 전우치의 태도에 웃음을 지우고 말았다.

“그렇게 따지면 우사 네 녀석도 천둥벌거숭이지 않았느냐. 왕을 속여 황금 대들보를 만들라고 시켜 그것을 훔친다거나, 요괴들 틈새에서 천서(天書)를 얻고자 스님들에게 거짓을 고하기도 하였지. 나는 탐관오리의 물건을 굶주린 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지. 도적질의 정도로는 네놈이 더 심하다.”

“그래도 나는 살생을 저지르지는 않았소.”

 루스는 확신했다. 이 자들은 귀부인에게 술을 먹인 니르타 경보다 더 악독한 사람들이다.

 세상에, 왕을 농락하다니. 그들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할 따름이다.

 강림이 떠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는 죽일 수 있을 법했다. 노려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살기도 묻어있었으나, 이는 토벌이 끝난 후의 기사단에게서도 자주 느끼던 기운이었기에 한숨을 푹 쉬고는 두 사람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제가 보기엔 두 분 다 똑같습니다. 기억도 안 난다는 옛날이야기 가지고 이렇게 싸우면 재밌습니까?”

 한심하다는 표정과 발언에 두 사람은 흥분을 가라앉힌 듯, 고개를 돌리고 방 안에 들어섰다. 그러더니 마치 싸운 후 토라진 아이들처럼, 홍길동은 서책을 쌓아둔 중앙의 앉은상 앞에, 전우치는 서쪽의 창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신의 몇십 배는 더 오래 살았을 사람들의 유치한 눈치싸움을 보던 루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동쪽 문갑 쪽에 남아있는 마법진 옆에 자리 잡았다.

 

미묘한 공기에 답답함을 느낄 때쯤, 문밖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계셔유~? 삼신할미 심부름 왔어유~”

 홍길동은 아이의 방문이 익숙한 듯 목소리를 높여 아이를 불러들였다.

“들어와도 된다. 누군가 했더니 구월이로구나.”

“예~”

 구월이라 불린 아이는 크게 대답하고는 문을 뻥-! 걷어차며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매화꽃이 수놓아진 흰색 저고리와 진달래꽃과도 같은 분홍색 치마를 입은 아이는 이제 겨우 일곱 살쯤 되어 보였다.

“새로 온 손님께 이 옷을 전하라고 삼신할미가 보내셨어유!”

 구월이는 그리 말하고는 머리에 이고 온 보따리를 내려 루스에게 안겨주었다.

“먼저 이거는 슨상님꺼! 풀어보세유!”

 보따리 속에는 루스의 머리색을 닮은 은빛 한복 두 벌과 갓이 들어있었다. 홍길동이 입은 것과 같은 두루마기 한 벌과 전우치가 입은 것과 같은 도포 한 벌. 두 옷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자 구월이는 쪼그려 앉아 옷을 펼쳐 보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삼신할미가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 선물하고 싶으시대유! 입는 법은 천둥벌거숭이들이 잘 알려줄거라구 하시던데유? 요거요거, 요거슨 머리에 쓰는 갓인데유, 지금 우치 형님이 쓰고 있는 것처럼 쓰는 거구, 그 뭐더라, 망건? 고것을 쓰고 쓰는 거래유! 슨상님은 그냥 써도 될 거라고 하셨어유!”

 구월이는 보따리에서 짐을 하나하나 꺼내며 그 물건이 무엇인지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아참참, 형님들한테는 전언이 있었는디!”

 한참을 설명하던 구월이는 깜빡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윽고 구월이가 목을 가다듬자 홍길동은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고, 전우치는 몸서리를 치며 귀를 틀어막았다.

“당신! 당장 귀 틀어막으쇼! 삼신할미의 전언은 무섭거든…!”

 영문을 모르겠으나 전우치의 행동에서 두려움을 감지한 루스는 조심히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미소년의 청각은 소중하니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귀를 틀어막음과 동시에 구월이는 삼신할미의 사자후를 토해냈다.

“큼큼, 시작할게유!”
[홍길동이 네이노오오오옴!!! 내 어린아이들이 있으니 그리 조심하라 일렀거느으으으을!!!]

 어린아이의 입을 빌렸어도 지체 높은 신인 삼신할미의 진언은, 단순히 귀를 막는다고 방어되는 것이 아니었다. 산천을 흔드는 목소리에 놀란 루스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홍길동을 쳐다보니,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느새 구월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내 어린아이들이 걱정스러워 친히 비망도에 자리 잡은 이후부터 네놈에게 누누이 일렀지 않느냐! 오늘날까지 내가 아이의 입을 빌려 네 녀석에게 잔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냐? 우사의 농이 아무리 우습다 한들, 네놈의 도술은 스스로 제어해야 할 것 아니냐! 덕분에 오늘도 간난이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어르신, 그 점은 제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변명은 필요 없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 그때는 친히 발걸음을 옮길 터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어르신 그것만은…!”

[그리고 이건 우사, 네 녀석도 포함되니 거기서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오너라!]

 

 삼신할미의 부름에 전우치 역시 주춤주춤 구월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르신, 저는 그저 저치와 서로 농을 주고받았을 뿐입,”

[물에 던져도 입만 동동 뜰 네 녀석의 변명 또한 필요 없다! 오늘과 같은 일이 추후 한 차례라도 더 일어나게 된다면, 그때는 내 기꺼이 네 녀석을 벌줄 것이다. 그리고,]

 구월이, 삼신할미는 숨을 고르고는 몸을 돌려 루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조곤조곤 설명하던 어린아이의 기운은 사라지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의 격이 느껴지자, 루스는 자연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삼신할미는 그런 루스가 귀엽다는 듯 눈을 접어 웃음을 지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아가, 조선에, 여기 비망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척 보니 저 녀석들에게 휩쓸려 아직 이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하지도 못했을 터. 미덥지 않더라도 저들을 믿어 보아라. 강림 도령과도 만나보았을 테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지. 구월이가 전해준 옷은 마음에 드느냐? 이국의 옷이라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만 네게 주는 선물이다. 부디 이곳에서 좋은 시간만을 보내길 바라마.]

 삼신할미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루스의 머리를 차분히 쓸었다. 그런 그 손길에 자기도 모르게 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삼신할미는 자신의 손을 거두고는 진언을 거두었다.

“진언은 여기까지래유! 형님들 한 번만 더 싸우면 그땐 진짜 저승 구경 가겠네유~ 아이고 무서버~”

“그래…조심하마. 와줘서 고맙다, 구월아. 삼신 어르신께도 안부 전해드려라.”

“예이~”

 새하얗게 변한 낯빛으로 구월이에게 축객령을 내린 홍길동은 구월이가 문을 여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다시금 넋을 놓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꺄르륵 웃은 구월이는 루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 후 삼신할미의 곁으로 여유롭게 돌아갔다.

 넋을 놓은 그들을 뒤로하고 루스는 홍길동의 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루스가 세 번째로 방문한 부엌에서 홍길동의 초인 중 하나인 초동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두 사람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전우치는 강림이 던져준 두루마리의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며 밖으로 나섰고, 홍길동은 문갑에서 문방사우를 꺼내 화선지에 유려한 필체로 글자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鏤璱. 새길 루, 색 슬.

색을 새기는 사람.

 

 검은 먹은 붓을 따라 두 개의 한자가 되었고, 세필붓은 그 아래를 수놓듯이 한글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루스의 이름은 새로운 의미를 담아 다시 태어났다.

"이 글자는 뭐라고 읽습니까?"

 전우치의 부적 덕에 의사소통은 가능하나 글을 읽을 수는 없었던 루스는 홍길동이 적은 내용에 대해 물어보았다.

“새길 루, 색 슬. 색을 새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네."

 

 홍길동은 글자를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가며 그의 이름에 붙인 한자를 설명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조선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라네. 나는 루슬 선생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색을 우리에게 새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 이리 붙여보았네지. 마음에 들길 바라네만, 괜찮은가?”

“첫인상에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선생입니까?”

 

 루스는 은회색 더벅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낯선 단어를 눈에 새기다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들보다 나이도 어리거니와 가르친 것 하나 없는데 선생은 무슨 선생?

“그거야 간단하지. 우사 녀석과 대등하게 농을 주고받고, 삼신 어르신의 사랑도 받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그러니 내게 있어 자네는 선생과 같은 존재라네. 하하하!”

 홍길동은 그리 말하며 구월이가 들고 온 보따리에서 한복을 꺼내 들었다.

“자, 그럼 다음은 의복이구만. 어느 쪽부터 입어보겠소? 두 벌 모두 선생의 머리색과 어우러지니, 역시 어르신은 색감에 조예가 깊으시다니까. 어찌 이리 선생에게 걸맞은 옷감으로 옷을 지어주셨을꼬!”

 은빛 도포와 두루마기의 소맷단과 앞섶에는 빛을 받지 않는다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세밀하고 은은하게 제비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두 옷이 다른 겁니까? 제가 보기엔 똑같은데요.”

“겉옷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소.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지. 제일 다른 점은 신분에 따라 나뉘겠지만, 여기서는 필요 없으니 옷에 관해서만 설명하겠소.”

 홍길동은 자신의 농에서 새하얀 저고리와 바지를 꺼내더니, 루스의 한복과 함께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든 옷은 속에 저고리와 바지를 입지. 이게 가장 기본이고, 우사 녀석이 입고 다니는 것이 ‘도포’, 내가 입고 있는 것이 두루마기일세.”

 이후로도 홍길동은 두루마기와 도포의 차이를 간단이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우사 저 녀석은 화려하고 꾸미는 것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니, 도포 외에도 망건에, 관자까지 하고 다닌다오. 꽃 관자는 세자저하도 안 하고 계시거늘! 그 녀석의 갓은 보았는가? 자기도 딴에 관직을 지냈다는 것을 표하고자 하는 건지, 옥로까지 달고 다니지. 온몸이 사치품이야. 그 녀석이 몸에 걸친 것 중 한두 개만 팔아도 5년은 거뜬히 지낼 수 있을걸세.”

 루스는 전우치의 모습을 생각했다. 확실히 온몸이 사치품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그가 걸친 모든 것이 고가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가 오늘 몸에 걸친 것을 판다면 칼립스 성을 꾸미는 데 든 돈을 채우고도 남는다는 계산까지 끝낸 루스는 상기된 목소리로 홍길동을 향해 외쳤다.

“그럼 우사님은 걸어 다니는 보석상과 같은 사람인 것 아닙니까? 사람이 허영심에도 정도가 있지, 나라 하나를 몸에 이고 다니는 그 용기만은 높게 사겠습니다. 그래서, 우사님은 그걸 어떻게 얻은 겁니까? 도적질이라도 한 겁니까? 친해지면 선물로 주기도 하신답니까?”

 머릿속으로 전우치가 몸에 걸친 장신구의 개수를 세던 루스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홍길동에게 물었다. 친분을 다진다면 자신의 손에도 어느 정도의 장식품이 들어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 섞인 눈동자를 발견한 홍길동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우사가 걸친 모든 것이 사치품이라 했지, 진짜라고는 하지 않았소?”

 홍길동의 대답에 루스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화려하고 꾸미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고는 했지, 그 사치품들이 모두 진품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진품이라고 한들 루스 자신의 손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창피함에 얼굴을 가렸다.

"그래서 루슬 선생, 어떤 옷을 입어볼 텐가?"

"....지금은 조금 창피하니 말 걸지 말아주십쇼."

“하하하하하! 창피해하지 마시오! 다 그런 법이니! 기왕 조선에 온 것, 도포를 입어봅시다. 찬찬히 도와줄테니 고개 드시고!”

 

 루스는 붉어진 얼굴에 열을 식히며 홍길동의 도움을 받아 어색하게 한복을 입었다.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도포를 걸친 후, 옷고름을 리본 모양으로 묶는 루스의 모습에 홍길동은 또 한 번 박장대소를 하며 그의 옷고름을 다시금 정리해주었다.

“하하하, 확실히 루슬 선생이 한 것처럼 매듭짓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난한 건 이 방법이라오.”

 솥뚜껑만 한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옷고름을 정리해주는 홍길동의 모습은 마치 처음 아기고양이를 들고 다니던 리프탄과 비슷했다. 큼직한 손에 들린 그것이 점심도시락이 아닌 고양이었다는 사실은 기사단 사이에서도 유명했지. 실없는 생각을 하던 루스는 큼직한 손으로 정갈하게 매듭을 지어주는 홍길동의 손을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큰 손인데도 섬세한 손놀림을 보이는 모습에 루스는 감탄을 속으로 삼켰다.

“이제 허리에 요거, 세조대만 두르면…. 완성이오!”

 허리춤을 감싸는 푸른색 세조대까지 두른 루스는 어색한 몸짓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전우치가 입고 있던 것 같은 화려한 색깔은 아니었지만, 루스의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도포는 마치 흩날리는 눈꽃과도 같았고, 푸른색 세조대가 그 중심에서 밋밋할 수 있는 색감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주는 선물일세!”

 홍길동은 흐뭇한 표정으로 루스를 바라보다 손가락을 튕겨 허공에서 목걸이 같은 것을 꺼냈다.

“입영이라고 한다네. 갓에 달아 장식품으로 사용하기도 하네만, 갓이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있지. 이건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입영인데, 나도 그렇고 우사도 그렇고, 푸른색에 조예가 깊어서 말이야. 루슬 선생에게 그 색을 남겨두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 주는 선물이라네. 껄껄껄!”

 홍길동은 그리 말하며 루스의 갓에 입영을 달아 그에게 씌워주었다. 진한 감청색의 보석이 루스의 청회색 눈동자와 어우러지니 그의 신비로운 매력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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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가짜입니까?”

“하하하, 이건 진짜라네! 장날에 가서 사두었던 것이지. 다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내게 온 것이었구먼!”

 홍길동은 그리 말하며 손뼉을 쳐 그의 분신인 초인(草人)을 불러냈다.

“선생, 이 자는 내 분신 중 하나인 초동이라 하오. 이 집의 관리를 맡고 있지. 내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집을 비우니 궁금한 것을 물어보거나 비망도를 돌아보시구려. 초동이 자네에게도 부탁함세.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말야.”

“알겠소. 선생은 아까 부엌에서 뵈었으니 인사는 생략하겠네. 비망도를 비롯하여 선생이 지낼 곳에 대해 알려줄 테니 나를 따라오시오.”

 홍길동은 그리 말하곤 허공에서 갓을 꺼내 머리에 쓰더니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어디를 가십니까?”

“이래 봬도 여기서 속죄 아닌 속죄를 하고 있으니, 나도 우사처럼 맡은 임무가 있다오. 이내 해결하고 오리다. 저녁까진 돌아오겠소.”

 이윽고 축지법을 쓰며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놀라움을 느끼기도 잠시, 루스는 초동의 손에 이끌려 홍길동의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하루 이틀 함께 할 사이는 아닐 것으로 보이니, 그대가 머물 곳과 이곳에 대해 알려주리다.”
 

 그 시각, 전우치는 구름을 타고 태백산맥으로 향했다.

“우리 차사님은 또 이런 어려운 일만 내게 주는구먼. 이렇게 적어서 줄 것이면 차라리 말로 전하는 게 더 이해되겠어.”

 

‘태백산맥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넘실거린다.

기묘함과 스산함을 동시에 지니나 도술사의 솜씨라고 하기엔 거칠다.

호(虎) 선생의 움직임 또한 언제나의 그것과는 다르다.

도사 전우치는 이 원인을 파악함과 동시에 그곳에서 길을 잃고 있는 어린 혼백의 구제를 도우라’ 

 

 닿지 않을 불만을 내뱉은 전우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두루마리를 말아 소매 속으로 넣었다.

“우선은 산군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봐야겠군. 태백산맥 호 선생들은 그의 식솔들이니.”

 태백산맥 중 가장 높은 산. 설악산을 수호하는 흑호 ‘산군(山君)’.

 모든 호(虎) 선생들을 통솔하는 그는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가지고 태백산맥에 군림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통제한다. 그는 집채만 한 몸집을 가졌음에도 어떤 동물보다 빠르며, 십 리 밖에서 움직이는 귀뚜라미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전우치는 패기 넘치던 어린 시절 이어진 인연에 감사하며 산군의 터에 진입하였다.

“우사. 자네가 여긴 또 웬일인가.”

“산군님 뵈러 왔지. 그간 잘 지냈는가?”

 절벽 끝에 앉아 설악산을 아우르듯 쳐다보던 산군은 그르렁거리며 그의 오랜 친우를 반겼다.

“네놈 덕에 공사가 다망하나, 덕분인지 범 사냥을 일삼는 무리는 줄어들었다. 그에 대해서는 추후 예를 고하지.”

“뭘 그 정도로 그러나. 나 역시 강림 차사에게 전해 받는 일을 자네의 도움으로 해결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오늘도 그 때문에 왔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게.”

 전우치는 품 안에서 붉은 두루마리를 꺼내 산군에게 건넸다.

 

“태백산맥에 넘실거리는 상서로운 기운이 뭐길래 산군 자네가 이리 날뛰고 있는겐가? 내 짧지 않은 시간을 그대와 보냈다고 생각하네만, 온 산의 기운이 날뛰는 건 처음이네."

 말이 길어질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전우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윽고 산군이 공중을 향해 뛰어드니 집채만한 흑호는 범상치 않은 인상의 건장한 성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한 시진 전에도 수상한 요기(妖氣)에 당한 인간이 있었다. 우사, 태백산맥이 요상해지고 있다. 창귀들이 사라졌어.”

 

 창귀(倀鬼) .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혼령이 악귀가 되어 호랑이의 시중을 드는 존재. 그 옛날 산군 역시 인간을 미워하던 시절에는 사람을 홀려 또 다른 창귀를 만드는데 일조하였으나, 최근에는 범 사냥을 오는 인간들을 홀리는 데에만 그들을 부리고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악귀가 섬기는 존재를 떠났다. 이는 필시 내가 억누르고 있던 악귀의 봉인이 파(破)했다고 본다네.”

“그게 가능한가?”

“악귀의 왕이 나타난게지. 온전한 신이 되기 위해 악귀의 왕도를 걷고 있는 왕이.”

 단호하고도 진중한 산군의 황금빛 눈과 마주한 전우치는 이번 일이 제 생각보다 더욱 복잡해질 것을 예상하고는 산군과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 일주일 후, 비망도.

 강림의 방문 이후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으나, 전우치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로 인해 홍길동이 여타 다른 일까지 맡아서 수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루스는, 초동과 함께하며 자신이 알아야하는 부분과 도울 의무는 없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한해서는 손을 빌려주게 되었다.

 하루는 삼신할미에게 인사를 하러 가니, 비망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녀린 풍채에서 흘러나오는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은 삼신할미의 존재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몸소 깨닫게 하였다. 루스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비망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 아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는 부모보다 일찍이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이들은 잊을 것이 없어. 이곳은 그 부모들에게 시간을 주는 장소인게야. 일찍이 아이를 잃은 부모의 가슴에서 그들이 잊힐 리 있을쏘냐. 간절히 그리는 만큼 이곳의 아이들은 성불하지 못할 뿐이거늘. 그저 그들의 삶에 또 다른 삶의 이야기를 덧씌워, 조금씩 괜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거지. 아이를 잊는 자가 있겠니. 아마 그 평생을 들인다고 한들 죽은 아이는 잊지 못할게다.”

 비망도(備忘島). 망각을 준비하는 섬.

 비범한 능력을 갖췄으나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도 짧았던 아이들의 혼이 잠시 머무는 곳.

 “특히 이곳의 아이들은 혼백이 찢겨나가 윤회의 흐름을 버틸 수 없는 아이들이다. 그러니 부모의 한이 얼마나 깊을까. 염라대왕이 이를 가엽게 여겨 도술을 배우면서 영혼이라도 회복시키고자 했단다. 회복한 아이들은 다시금 윤회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것이지. 그런데 그 중한 임무를 어찌 저 천둥벌거숭이들에게만 맡겼을꼬! 내 아이들 걱정에 편히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새로이 터를 잡게 되었단다. 덕택에 아가, 너와도 만나게 되었으니. 오늘만은 염라대왕의 선택을 긍정해야겠구나.”

 루스는 이 중요한 일을 어째서 그 둘이 담당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으나, 화를 내던 삼신할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홍길동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날에는 그 역시 넓은 공터에 나가 아이들이 도술을 배우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옳지, 환술은 그렇게 쓰면 된다. 진언을 내뱉는 것은 수행이 필요하니 쉬이 시도하지 말거라. 춘삼이 네가 환술로 부엉이 열 마리를 만들 수 있다면 그때 제대로 알려주마.”

 홍길동은 초인을 불러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적합한 도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루스에게도 배정된 초인, 홍동을 바라보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왜 우사만 얽히면 바보스러워지는지 의문입니다.”

“하하하! 홍길동 저자는 우사 같은 사람에 약하니 선생이 이해해주시구려. 모두가 개성을 가진 것이 좋지 아니한가! 나처럼 초인이라고는 하나 서로 이름도 가지고 있고, 같은 초인이라도 초동이와는 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보고 웃어 넘기시게.”

 그리 말한 홍동은 손짓을 하여 홍길동을 불러냈다.

“길동 자네도 말일세, 오늘부터는 선생에게 도술에 대해 언질을 준다고 해놓고 또 까먹었지?”

“아참참, 그걸 잊고 있었구먼. 고맙네, 홍동이! 구월이랑 대길이는 이리로 오거라!”

 홍길동은 홍동의 말에 황급히 아이들을 불러냈다. 저만치에서 초인과 대련을 하던 두 아이는 홍길동의 부름에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그의 앞에 섰다.

“너희 둘은 도술식 그리기에 특출나니 루슬 선생을 도와 공명하는 술식에 대해 조사해주었으면 한다. 괜찮겠니? 겸사겸사 훈민정음도 알려드리면 더욱 좋겠구나”

“맡겨만 주셔유! 할 수 있는 맨큼 다 보여드릴게유!”

“예, 형님!”

 

 특출난 아이들을 따로 뽑아 루스의 연구를 돕게 만든 홍길동 덕에, 루스는 오늘까지 훈민정음을 외우고, 도술의 기초와 활용 방법, 마법과 도술의 상관관계 등을 찾아내며 분석할 수 있었다.

 

“거기,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지금 소환진 그리는 거 아니었습니까?”

“헉, 맞습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환진 그릴 땐 여기, 중심부를 인지하면서 해야 한다고 구월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더 집중하십쇼.”

“예! 알겠습니다!”

 덕택에 지금의 루스는 자잘한 실수를 하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조언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자네가 나 대신 아이들을 가르쳐도 되겠소.”

“그런 소리 하지마십쇼.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치니까.”

 두 사람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동쪽에서는 전우치가, 남쪽에서는 강림 차사가 구름을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서둘러 아이들을 자신의 뒤쪽으로 물린 홍길동이 둘을 맞이했다.

“두 사람이 같은 시각에 도착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소?”

 구름에서 내리자마자 전우치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강림을 보고 홍길동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질문했다.

“우사 녀석이 이곳으로 오라고 기별을 넣었기에. 전번에 넘겨준 임무와 관련이 있다며 빨리 오라 닦달이지 뭔가. 덕택에 소임도 다 행하지 못하고 왔으니, 최대한 빨리 이야기하길 바란다. 시답잖은 내용이라면 우사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게다.”

“거참, 그리 성격이 급해서 어찌하오? 우선 길동 형님네로 갑시다. 설마 아이들 앞에서 말하길 바라는 게요?”

 강림은 그제야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한 듯, 손짓하여 아이들을 물리곤 전우치를 재촉하여 홍길동의 집으로 향했다.

“얘들아, 오늘은 차사님이 바쁘신가 보구나. 인사는 다음에 하자꾸나. 짐을 챙겨 삼신할미 곁으로 돌아가지 않으련?”

“알겠습니다! 형님 내일 봬요!!”

“루슬 선생님도 내일 봬요!!”

“조심히 가십쇼. 또 넘어지겠습니다.”

 홍길동과 루스는 아이들을 돌려보내고는 서둘러 홍길동의 집으로 향했다.

 

 홍길동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방 안으로 들어선 전우치는 큰 책상을 만들어 그 위에 형형색색의 두루마리들을 펼치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도술사가 아닌 존재가 부리는 기운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었네만, 이것이 상당히 얽히고 설켜 있더이다. 여기, 이것들 좀 읽어보시오.”

 

 전우치가 가리키는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보는 강림과 홍길동의 표정이 점점 아리송하다는 듯 변해갔다.

 

‘아들이 호환마마를 만나 상을 치른 지 한 해나 지났는데 엊그제 다시 돌아왔다.’

‘실종되었던 주막의 주인이 돌아와 과부가 펑펑 우니 그 소리가 온 마을을 흔들었다.’

‘사흘 전 사냥을 나갔던 고성군수가 헛것을 본 듯 넋이 나갔으나 사흘 뒤 정신을 차리더니, 그 이후 누군가를 찾으라 명하였다.’

 

“…. 이것들은 다 무언가?”

“이들은 모두 산군 휘하의 창귀였소. 요 일주일 사이에 이승에 다시 돌아왔다는 근처 주민들의 증언이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몸이 멸한 자들이 버젓이 인간들과 섞여 지내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가능할 리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일 터인데!”

 전우치의 이야기에 그럴 리 없다는 듯 강림이 반문했다. 영혼은 그를 담을 그릇이 없다면 제대로 유지되지 않고 구천을 떠돌아다니다 악귀로 변하는 법, 심지어 창귀였던 영혼들이 다시금 인간처럼 변했다는 것은 있을 리 만무했다.

“그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으니 문제인 것 아니오. 그리고, 제일 중한 것은 바로 이 부분.”

 홍길동은 전우치가 내짚은 두루마기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고성군수는 고을 내에 존재하는 점쟁이, 무당 등을 불러 모아라 명을 내렸으며, 이들에게 한 나졸과 함께 설악산 산기슭에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오라 명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는 이가 없었다. 이에 의구심을 느낀 나졸들이 이들을 찾아 나서니, 산기슭에서 머리가 깨진 채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보통 창귀들은 사람을 홀리기만 할 터인데, 무더기로 홀려 데려간 것과 머리가 깨진 채 죽었다는 겐가?”

“근래 명부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음에도 죽어가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 심상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창귀가 원인이었던 것이군.”

“제가 봤을 땐 아닌 것 같습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눈앞에 놓인 두루마리를 읽던 루스가 말했다.

“창귀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모르겠으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알겠습니다. 요컨대 죽은 자가 돌아와 산 사람을 홀린다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소. 창귀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후 악귀가 된 자들인데, 호랑이를 두려워해 그들의 시중을 자초하지. 인간을 홀려 호랑이 앞으로 데려가는 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힘이오. 그런데, 산군은 자신의 밑에 있던 창귀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소. 이는 필시,”

“호랑이보다 두려우면서 복종해야 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루스는 그리 말하며 중앙에 놓인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존재가 여기 적힌 ‘두억시니’라는 존재로군요.”

“맞소. 최근에 영매사들 사이에서 이런 소문이 돌았다고 하더군.”

 전우치는 주머니에서 또 다른 두루마리를 꺼내니 강림이 이를 뺏어 내용을 읊었다.

“거참, 성격도 급하시네!”

“...‘서국에서 강한 도력(道力)을 지닌 은백색의 도사가 나타나니, 그를 취하는 자는 갈망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창귀는 되살아나고, 반신은 신이 될 수 있으며, 도인은 선인(仙人)이 될 수도 있을 테지.”

“내 생각에는 두억시니가 이 소문을 듣고 요력(妖力)을 키워 창귀들을 꾀어낸 것 같네. 태백산맥을 따라 이동하면서 창귀란 창귀는 다 끌어들이고, 산에서 마주한 인간이란 인간은 죽여나가니, 산군을 비롯한 호 선생들이 이를 뒤늦게 발견하고 범인을 찾아 헤매느라 그들의 움직임 역시 평소와는 달랐을 터.”

 루스는 두억시니라는 자가 찾는 이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 은백색의 도사라는 거, 누가 봐도 저 아닙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네. 마법도 어찌 보면 도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하긴, 저 같은 천재 대마법사라면 저런 소문이 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만, 은백색의 도사라니. 하, 이 천재적인 실력이 여기까지 소문이 나서 어쩐답니까? 정말 놀라울 따름이로군요.”

 강림은 루스의 자화자찬을 한 귀로 흘리며 또 다른 두루마리를 읽어나갔다.

“이승에서 일어난 신묘한 일에 백성들이 두려워하니 정체를 알아봐달라는 상소가 궁으로 들어갔었다. 미신을 신봉하는 왕이 당장에 무당을 불러 그 존재에 대해 알아내고자 한 것은 정해진 절차겠지. 저 소문은 아무래도 궁에서 점을 친 영매사로부터 시작한 모양이로군.”

 루스가 소환되기 얼마 전, 이승의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리며 수상한 물체를 발견했다는 상소가 각 고을 수령들을 통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는 추후 광해군일기에 남아 후세의 사람들 사이에서 ‘광해군 시기 UFO 소동’이라고 불리게 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왕은 영매사와 무당을 불러 이 일에 대해 점을 쳤고, 그때 내린 예언이 영매사 사이에서 퍼져 위와 같은 소문이 돌게 된 것이다.

 네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예상보다 얽히고 설켜 있는 이 사건은 이미 수많은 희생자를 동반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홍길동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를 잡으려면 역시 루슬 선생을 미끼로 던지는 수밖에 없겠군.”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저승에서도 이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는 것은 막으라고 할 것이다.”

“아니, 잠시만요. 월등한 실력을 제외하더라도 미끈하게 잘 빠진 몸매와 수려한 미모, 명석한 두뇌를 가진 저를 죽이실 셈입니까? 저는 지금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안 죽는다.”

 강림은 귀에 담기에도 거북한 단어를 들은 듯, 표정을 굳히고는 대답하다 명안이 떠올랐는지 루스에게 물었다.

“루슬, 자네 검술은 할 줄 아는가?”

“이래 봬도 기사단 소속이니 눈으로 익히기는 했습니다만, 실전 경험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검술은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부터 홍길동이나 우사를 통해 배우도록. 미끼가 되지 않고 그 악귀를 처리할 방법은 검술을 활용하는 법 뿐인 듯하니.”

 그와 동시에 강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이 사실을 대왕님께 전하러 가겠네. 이번 일에 악귀가 연관되어 있다면, 이렇게까지 명부가 혼란스러운 원인 역시 그것임이 분명해. 며칠 내로 해결책과 함께 방문할 테니, 그동안 루슬 자네는 검술에 대해 익혀두는 게 좋은걸세.”

“아니 저기 잠시만요!!”

 강림은 그 말을 끝으로 다급히 문밖으로 향했다. 루스는 스쳐 지나가는 그의 표정이 마치 드래곤 토벌을 나갈 적의 렘드라곤 기사단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죽은 자의 혼을 거두어가는 저승차사에게 있어서 악귀는 더없이 성가신 존재였다. 근래 급격히 늘어난 사고사, 그리고 회수할 수 없을 정도로 찢겨 소멸당한 수많은 혼백. 강림은 두억시니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저승으로 향했다.

 강림이 떠난 후에도 전우치와 홍길동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애초에 루슬 자네가 이 곳으로 오게 된 것

 저 치가 여기에 나타난 것 역시 악귀의 소행일지도 모르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는 요상하고 신묘한 것이 관련있던 것 같긴 한데, 그건 못 알아냈다우.”

“그래서, 그걸 알아본다고 이레 동안 기별도 없었던 게냐?”

“어쩔 수 없었수. 형님이야 초인을 써버릇하니 이미 수족을 다루듯 자유로울지 몰라도, 내 전문분야는 환술이라. 사람들 홀리면서 물어보고 다니니 내가 마치 창귀가 된 듯했다니깐?”

“내가 초인을 부리는 법을 알려준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변명을 하는거냐. 도대체 언제까지 쓰려는 건지, 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서리치는 전우치를 보며 홍길동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를 점령 중인 두루마리를 손가락을 튕겨 정리하고는 다시 손을 휘저어 목도를 소환해 루스에게 건넸다.

“기사단 소속이라고 했으니, 기본적인 전술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도 되겠소?”

“아뇨. 그저 기사단의 상징, 귀염둥이 마법사라고 생각해주십쇼.”

“하하하, 그렇다면 갈 길이 구만리구먼! 한정된 시일 내에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대한 도와보겠소!”

 홍길동은 호탕하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멀뚱히 목도를 관찰하는 루스를 보며 그에게 고행의 길이 열렸음을 직감한 전우치는 지친 몸을 책상 위에 누이고는, 깊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렇게 단기간 집중학습! 초보자도 쉽게 배우는 검술교실이 시작되고 며칠 뒤, 강림은 아침 일찍 그들을 찾아왔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루스는 초동이와 홍동이의 감시하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내 앞전에는 급히 돌아가야만 했기에 검술 연습만 하라고 했는데, 검술에 대해서는 진전이 있는가?”

“도령, 아무래도 단기간엔 무리일 듯하오. 검을 휘두르는데, 내가 다 불안해지지 뭐요. 검 하나도 겨우 드는 이에게 검술은 꽤나 시간이 걸릴 듯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네. 이번 일은 루슬이 직접 이 검을 그 악귀에게 찔러넣어야 해결될 듯하니. 루슬, 잠시 이쪽으로 와보시게.”

 그리 말하며 강림은 옷소매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헉…허억…. 뭡니까?”

 꼭두새벽부터 불려 나와 팔자에도 없는 검을 다루는 루스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내몰아 쉬며 물었다.

“‘칠성검(七星劍)’이라네.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사인검이 없으니, 이것으로라도 해결해야지.”

 사인검. 정식명칭은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으로 인(寅)년 인(寅)월, 인(寅)일, 인(寅)시에만 만들 수 있는 신성한 도검이다. 대대로 왕실에서 악한 기운을 끊어내고 재앙을 막아내는 도검으로 현재 염라대왕이 가지고 있는 사진참사검(四辰斬邪劍)의 아류에 가까우나 그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기운만으로도 하급 악귀들은 소멸시키는 도검이기에 저승에서는 차사들에게 배급하고 있었다. 강림이 들고온 칠성검은 이 두 검과는 달리 칠성신의 가호를 받아 만들어진 검으로, 위의 두 검처럼 강한 기운은 담고있지 않지만, 악귀 소멸 정도는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물건이었다.

“두억시니는 악귀라고는 해도 반신에 가까운 존재. 신의 가호를 받아 악한 기운을 끊어낼 수 있는 성검(聖劍)이 필요하지. 그렇기에 그대가 검을 다룰 수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강림은 아직도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있는 루스를 일으켜 세워 그의 허리춤에 검을 채워주었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연구 하기에도 벅찰 터인데, 그대에게 이리 무거운 짐을 맡기게 되어 미안할 따름이다. 그, 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됐는가?”

 거친 숨을 고른 루스는 허리춤을 묵직하게 만드는 검의 무게를 느끼며, 이것이 마치 자신을 이 세계에 묶어두려는 세상의 무게 같다고 생각했다. 벗어날 수 있으나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제게 다가온, 무거운 압력이었다.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밝혀진 것은, 누군가가 저를 이곳으로 “소환”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언급한 ‘신묘한 일들’이 소환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이구요. 제가 이곳으로 소환된 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자네를 소환하려는 도술을 누군가가 펼쳤다는 것인가?”

“네. 그리고 그 존재는 아마도,”

“두억시니.”

홍길동의 말에 따르면 두억시니는 이전부터 완전한 신이 되고자 수많은 도술사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술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취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가 온전한 신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예로부터 악한 것을 숭배하는 세력은 존재했지. 조선에도 마찬가지라네. 도사가 되고 싶었으나 수행을 게을리하는 자들은 어쭙잖은 실력에도 감탄하는 악귀들의 편에 서기도 했다네. 서국 마도사들까지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야.”

악귀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수족은 잡아먹기도 했다. 홍길동은 두억시니가 우연한 기회로 서구의 마도사를 취했고, 그때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더 많은 마도사를 찾아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역시 소문을 통해 파악한 것이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서구에서 오는 자들이 줄어들긴 했다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악귀는 아마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용해 더 많은 마력을 가진 존재를 소환하려고 했겠지.”

 

 

 홍길동과 루스가 내린 가설을 들은 강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견에 동조했다.

“맞는 말이다. 우사처럼 여우 구슬을 삼킨다면 도술을 배울 수 있는 신체로 기(氣)의 흐름이 변하지만, 도술사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그자의 도력(道力)까지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서구의 마도사들은 루슬의 말에 따르면 ‘마나’라는 존재를 통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으니, 악귀의 기운과 융합될 수도 있겠구먼.”

“우사 녀석이 태백산맥을 돌아다니며 도술을 사용한 흔적을 찾아내고 있소. 개중에 악귀를 숭상하는 도술사를 발견한다면 호리병 속에 담아 데려온다고 하니, 도령은 걱정하지 마시구려.”

“길동이 자네가 그리 말하면 우선은 한시름 놓겠군. 다만 걱정인 것은 루슬의 괴멸적인 검술 실력이로구먼.”

“연습하면 되지 않습니까! 연습하면! 천재 대마법사의 실력은 마법 외에서도 빛난다구요!”

 

 강림의 도발 아닌 도발에 루스는 소리를 빽 지르더니 다시금 초동과 홍동을 불러 검술 연습을 시작하였다. 비록 칠성도를 들고 있는 양팔은 부들거리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휘청거리고 있지만, 루스는 자신이 해낼 수 있음을 의심치 않았다.

“저런 이들은 자존감을 깎아 내는 발언을 하면 금방 열을 올려 성공해내고 만다네. 아직은 악귀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니 여유를 가지고 가르치면 될 것이다.”

“가끔 보면 도령은 우사 녀석보다 더하다 싶을 때가 있소.”

“그런 악담을.”

 두 사람은 비틀거리는 루스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서쪽 하늘에서 전우치가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자네는 할 일도 없나? 허구한 날 형님 옆에서 노가리나 까고 있다니.”

“보자마자 내뱉는 말에 기품이라곤 하나도 없구만. 자네의 수준 또한 나날이 퇴보하고 있음을 깨달았네.”

“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말에 가시가 없으면 대화가 안 되는 거요?”

 이글거리는 가마에서 금방 꺼낸 주물과도 같은 그들의 눈동자는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글거리며 불꽃을 피워냈다. 그것도 잠시, 전우치가 더 싸울 마음은 없다는 듯 눈을 감더니 루스를 불렀다.

“루슬! 자네 꽤나 유명해졌던데? 왕이 자네를 찾고 있어!”

“예?”

 전우치의 발언에 중심을 잃은 루스는 검을 휘두르던 방향으로 쓰러졌고, 초동과 홍동이 그런 루스를 잡아챘다.

“조심하시게.”

“아, 감사합니다. 우사님, 뭐라구요?”

 루스는 칠성검을 갈무리하고 전우치의 앞에 섰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왕이 저를 찾는다니.”

“온 나라에 방(榜)이 붙었네. 은백색의 도사를 찾아낸 자에게는 은자 스무 냥을 주겠다고. 이야, 형님. 루슬의 몸값이 우리보다 높은 것 같지 않소?”

 

 전우치는 손에 쥐고 온 방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루스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하며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왕께서 서국 출신의 은백색의 도사를 찾고 계시니,

누구든지 발견한 자에게 은자 스무 냥을 하사한다.’

“조선의 왕이 미신을 숭배한다고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의 왕이 좀…. 정상은 아니라서 말야. 맑았던 영혼이 탁해지니 미신을 숭배할 수밖에.”

 전우치는 그리 말하고는 손가락을 튕겨 방을 불태웠다.

“이틀 전부터 전국팔도에 이러한 방이 붙기 시작했으니, 지금쯤이면 관군까지 나서서 온 마을의 서국 출신들은 다 잡아가고 있겠구먼. 루슬 선생은 어찌 하실 건가? 내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필요하다면 도와주고.”

“화제의 중심에 서는 것은 사양하고 싶습니다만,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하…”

 

 수상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걸친 전우치를 바라보며 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온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거의 모든 일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니, 신이 있다면 자기를 괴롭히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홍길동은 악동과도 같이 빛나는 전우치의 붉은 눈을 바라보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루슬 선생, 우사가 저런 표정으로 변했다면 필시 사소한 농은 아니라오. 부디 무탈하길 바라네.”

 루스는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홍길동의 마지막 말을 흘려들었다. 어떤 농이라고 해도 지금 자신의 처지보다는 덜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전우치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럼 지금 바로 처리해버리자고! 형님, 이 녀석 좀 빌리겠소!”

 

 어느샌가 용으로 변해 하늘을 날고 있는 전우치의 목을 껴안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루스였다.

“루슬의 혼은 거두게 된다면 어디로 인계해야 할지 생각해봐야겠군.”

“도령이 말하면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니깐! 허허허!”

 

 섬뜩한 농담을 주고받는 둘은 붉은색 용이 구름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며 루스의 안녕을 기원했다.

 

 

한 시진 후, 경운궁 상공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자네를 찾아내려고 온 나라를 뒤엎을지도 모른다니까.”

“그래도 용을 타고 나타나는 존재라는 게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만!”

 

그들은 경운궁에 있는 왕의 거처 위의 하늘에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우치가 제안한 작전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대뜸 왕 앞에, 그것도 용을 타고 가서 ‘날 찾지 마십쇼!’ 하고 외치라니, 잘못 걸리면 저 진짜 죽는 거 아닙니까?”

“하늘에서 용을 타고 나타났다면 필시 비범한 인물일 터이니 쉬이 죽이진 않을 것이고, 루슬 자네의 성격대로 솔직히 말하면 저 비뚤어진 왕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것이 분명하니 그런 것 아니오. 아니면, 그대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이 투입되고, 그들이 악귀에게 당하길 바라는 거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루스의 표정이 굳었다. 전우치는 이때다 싶어 그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그대의 심장이 이렇게까지 차가운 줄은 몰랐소.”

“아 진짜, 합니다. 한다고요.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억울한 희생자를 줄이려고 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그래그래, 믿어주리다. 위험하면 구하러 올 테니,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내뱉으시게.”

 전우치는 루스의 대답에 만족한 듯 허공에 대고 크게 포효하더니 루스를 즉조당 앞에 내려놓았다.

 

 용의 포효를 듣고 몰려든 조정 대신들과 신하들을 향해 루스가 외쳤다.

“왕인지 임금인지 하는 자에게 고하시오. 그대가 찾던 은백색 도사가 당도했으니.”

 적룡의 움직임으로 불어온 바람에 펄럭이는 은색 도포는 마치 강가에 비친 햇살처럼 반짝였으며, 마치 한 필의 비단 같은 고운 자태를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푸른색 세조대와 입영이 그의 청회색 눈동자와 동화하여 고고한 기운을 뿜어냈다.

“안 들립니까? 가서 당신네 왕 모셔오라는 말입니다. 그토록 찾던 사람이 나타났는데 신하들 반응이 이게 뭡니까?”

 서툴지만 확실한 조선말에 주변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자신들의 왕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왕은 이미 자신의 거처 앞에서 나는 큰 소리에 친히 발걸음을 행한 이후였다.

“전하-!!”

 왕을 발견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절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단 한 사람, 루스를 제외하고.

“붉은색 옷에 가운데 용 문양을 달고 있는 사람…당신이 이 나라 왕입니까?”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느냐!”

“저는 당신들과는 다른 곳의 왕을 모시고 있기에, 제가 이곳의 왕에게 진정한 존경을 표할 수도, 표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정도로 참아주시길”

“이런 무엄한!! 네놈이 지금,”

“당돌하군”

 왕은 손을 들어 화를 내는 신하를 저지하였다.

“과인 앞에서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다는 거겠지. 참으로 우스워. 그대의 왕은 내가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그대가 서 있는 이곳은 내가 왕으로 있는 곳이다. 그대는 이 나라의 땅을 밟고 있음에도 과인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만큼의 힘이라도 있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지금 당장이라도 루스를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오만하고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남자.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 이들의 왕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크로이소 공작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뭐,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존재를 찾아다니며 이루지도 못할 소망을 비는 것은 어리석은 군주의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루스는 그리 말하며 입영을 만지작거렸다.

“‘서국에서 강한 도력(道力)을 지닌 은백색의 도사가 나타나니, 그를 취하는 자는 갈망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도력이 강한 것도, 서국에서 온 것도 맞습니다만 갈망하는 바를 이루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대는 과인이 바라는 소망이 무엇인 줄 알고 그리 이야기하는게냐.”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루스는 손가락을 튕겨 얼마간의 마력을 뭉쳐 보였다. 그는 붉은색의 공과 같은 자태를 뽐내는 마력 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힘이 필요한 자는 저를 통해 군사력을 강화할 것이고, 재산을 원하는 자는 도술이라도 써서 은자를 만들라고 하겠죠. 영생을 바라는 자는 저를 잡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 방법을 찾고자 할 것입니다. 아닙니까?”

 이윽고 뭉쳐낸 마력을 하늘로 쏘아 올린 루스는 전우치가 오기 전, 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 바라는 것은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을 외면했습니까? 지금 도성 밖에 악귀가 활개 치는 것은 알고 있긴 합니까?”

 그때,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남쪽 하늘에서 적룡이 나타났다. 루스가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니 적룡이 그를 자신의 등에 태우고는 경운궁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이윽고 왕을 향해 악담 아닌 악담을 외치고 다시금 남쪽 하늘로 사라졌다.

“일국의 왕이 품지 못할 자를 바라니, 그릇된 욕심에 수많은 자가 희생될지어다. 어미와 형제를 죽이고 차지한 자리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일은 없을 터. 민심을 잃고 조롱받으며 불명예의 극치를 누리게 될 것이다.”

 

 적룡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틀 전 관군들이 전국을 돌며 붙인 방이 찢어진 채 놓여있었다.

 루스는 적룡의 등에서 자신이 왕에게 한 말을 곱씹다가 전우치의 발언을 지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악담의 정도가 심하지 않습니까?”

“알게 뭐요? 그리고 그 이야기 중에 거짓은 없소. 한 번 탁해진 영혼이 다시 정화되려면 그만큼의 선행을 행해야 할 텐데, 그자는 염라대왕께서도 예의주시할 정도로 정화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인물이니. 곱게 죽지는 못할 테지.”

 전우치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꼬여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루스는 해탈한 듯 한숨을 내뱉고 그의 등에 몸을 맡겼다.

“이정도로 찔렀으면 관군을 통해 저를 찾지는 않겠죠? 악귀 처치를 위한 준비만으로도 고된 나날인데 왕까지 이렇게 미쳐있다니. 조선은 도대체 무슨, 마계입니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왕의 면전에 대고 악담을 퍼붓고 온 두 사람의 활약 덕인지, 다음날부터 은백색의 도사를 찾는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덕택에 루스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검술 연습과 아이들과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전우치는 산군과 함께 태백산맥 일대에 숨어있는 두억시니의 추종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산군의 도움으로 두억시니의 추종자들은 다 여기에 모아두었소. 이제 남은 것은 그 악귀를 처리하는 것뿐인가?”

 

 호리병 예닐곱 개를 엮어 홍길동에게 건넨 전우치는 지친 기색을 보이며 갓을 벗어 던지고 마루에 몸을 뉘었다.

“그렇지. 루슬 선생 역시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도술식을 만들어 전투에 활용하고자 한다니, 그 부분만 정리된다면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을걸세. 너는 이거나 마셔라.”

 전우치의 고충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제 일이 바빠 돕지 못한 것에 미안해하던 홍길동은 그가 이곳에 돌아올 때마다 수정과와 탕약을 지어 내밀곤 하였다.

“그러니까, 나는 쓴 것보다는 달큰한 것이,”

“들이키고 나면 당과를 줄 테니 눈 딱 감고 마셔라.”

“거참…”

 전우치는 항상 불평하지만, 그 정성을 알기에 마시지 않은 날은 없었다.

 

“그럼 이 부분을 이렇게 하고…. 구월이랑 대길이의 환술을 엮을 수 있을까요?”

“그럼유! 이래 봬도 대길이랑은 꽤나 오랜 시간 함께 했구먼유!”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인(寅)보다는 묘(卯)의 기운을 담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런 방향으로 수정한다면…”

“완성!!!”

 

 루스는 칼립스 성을 지키는 방어 마법진을 아이들과 함께 조선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 것과 더불어 마도구를 만들고 있었다. 이를 통해 두억시니의 발을 묶을 수도 있었고, 아이들이 활용한다면 더욱 상위의 도술을 사용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술의 완성과 동시에 기쁨에 겨워 팔짝팔짝 뛰는 아이들을 보며 루스 역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야 세계탑 출신의 천재 대마법사이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조그마한 아이들의 수준이 세계탑에서 생활하는 자들과 엇비슷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덕분에 예상 기간보다 월등히 빨리 수식을 개량할 수 있었다.

“두 분 덕분에 훌륭한 개량마법진과 마도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선생님 덕에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은 저희이니 너무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대길이 말이 맞아유! 저희도 슨상님 아니었음 이렇게는 못 했을 거에유. 길동 형님이나 우사 형님이 도술에 능하다고는 해두 이국의 마법은 모르는 것이잖아유!”

 루스는 이런 아이들이 대견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만히 그의 쓰다듬을 받고 있던 대길이가 잊은 것이 떠오른 듯 옷소매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전해드리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왐마, 대길이 너 아직도 안 드린겨?”

“그것이, 여기에만 오면 너무도 즐거워 드리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주 호오온나야겠구먼!”

 대길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소매 속에 넣어 온 작은 주머니를 루스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풀어보세유! 저희 모두가 슨상님 드리려구 삼신할미랑 만든 거에유!”

 주머니를 여니 자신들이 만들고 있던 마도구와 비슷한,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팔찌가 들어있었다.

“루슬 선생님은 그 이름처럼 저희에게 청회색 빛을 새겨주셨습니다. 이는 저희의 감사 인사입니다.”

“슨상님 덕택에 서국의 마법도 배울 수 있었어유!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고 해서, 부적처럼 만든 거에유!”

“맞습니다. 전투에 있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저희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루스에게 너무나도 많은 정을 줘 버렸다. 망각을 준비하는 섬의 아이들이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자에게 자신들을 기억할만한 물건을 만들어서 선물하다니, 역설적인 부분이었지만 루스는 팔찌를 팔목에 끼우며, 잔잔한 미소를 띠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보기에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손목을 감싸는 무게에 루스는 한참을 팔찌에 시선을 두다가 아이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팔찌 만드는 법, 알려줄 수 있습니까?”

“그거야 간단합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대길이의 질문에 대답을 고민하던 루스는 솔직히 말했다.

“저도 고마운 마음은 표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날 저녁, 개구리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삼으며 달을 바라보던 루스는 마도구를 찬 팔을 뻗어 개량한 마법식을 시험해보았다. 달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도포자락과 함께, 아이들이 만들어준 팔찌와 마도구가 부딪치며 맑고 청명한 소리를 일으켰다. 이윽고 손끝에서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일어나더니 문밖으로 나서던 개구리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정도면 성공이지.”

 툭, 루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도구가 손목에서 떨어지더니 개구리 역시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강력한 마법을 펼칠 수는 있었으나 부족한 재료 때문인지 일회성 마도구가 제작된 것이다. 루스는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여유분의 마도구를 꺼내 손목에 다시 채웠다. 그런 루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전우치는 자신을 향해 급히 날아오는 전서구를 발견하고 팔을 뻗었다. 새하얀 송골매. 산군이 보낸 전갈이다. 서둘러 매의 발목에 걸려있는 쪽지를 빼어내자 맹금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듯 날개를 푸드덕거리곤 다시 상공을 향해 날아갔다.

‘두억시니. 설악산 마등령 부근. 두 시진 이내 이동할 것으로 보임. 천재일우.’

 날아다니는 활자가 그의 눈에 안착하고, 전우치는 다급하게 루스를 불렀다. 자신의 심복들이 모두 사라지자 정체를 숨기기에 급급했던 두억시니가 나타난 것은 말 그대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루슬, 도술과 검술은 이제 완벽한 게요?”

“마법이야 언제나 완벽합니다. 검술은 뭐, 심장을 꿰뚫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 지? 심장이 급소이니 거기만 노리면 되겠지.”

 짧은 시간 안에 적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급소를 노리는 전투 방법이 효과적이다. 강림의 조언에 따라 최소한의 방어와 찌르기를 배운 루스의 검술은, 실전은 전무하다고 했으나 그 역시 전장을 누비던 기사단의 일원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럼, 지금 당장 두억시니를 해치우러 갑시다.”

“예? 이렇게 급하게요?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어쩌겠수. 악귀가 미리 언질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니.”

 급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한 루스는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법한 문장을 내뱉었다.

“그럼, 아이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없습니까?”

 비록 루스 자신이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짧았으나, 그렇다고 인사도 없이 떠날 정도로 비정한 관계는 아니었다.

“서두른다면 그 정도는 괜찮겠지. 일각이 급하니 서둘러 다녀오슈. 그사이에 나는 형님께 상황을 설명해놓을 테니.”

 전우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스는 몸을 돌려 삼신할미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이상했다. 전우치에게 있어 이곳의 아이들은 당장 내일 사라진다고 해도 무심히 대할 수 있는 존재였다. 혼의 회복 정도를 보며 속으로 지레짐작하는 것 역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겠으나, 애초에 이곳의 아이들은 그 자신처럼 속죄의 굴레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떠날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과 길어봤자 달포 정도 함께 지낸 존재가, 어찌 그리 아이들에게 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인지, 이승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전우치는 복잡해진 머리를 누르며 홍길동에게 향했다.

 자신들에게 감정은 사치다. 지금은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일 뿐.

“형님! 길동 형님! 급한 일이오! 빨리 좀 나와보슈!”

 서둘러 달려왔음에도 삼신할미의 저택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달이 떠오름과 동시에 수마의 늪으로 빠져드는 아이들의 이부자리를 매만져주던 삼신할미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루스를 보며 인자하게 말을 건넸다.

“갈때가 된게지?”

“예. 뭔가…. 그냥 가기에는 뭔가 걸려서 말입니다.”

 삼신할미는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든 아이들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얹어져 있었다.

“정을 주고받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자들만의 특권이지. 내 아이들이 느끼는 것 중에 가장 아름답고 애처로운 것이란다. 아가, 너는 이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었구나.”

 그의 큼직한 손이 루스의 이마에 닿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이름처럼 아이들에게도, 네게도 새겨졌으니. 직접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고 서운해 말거라. 자식 잃은 부모가 그 아이를 잊는 법이 없듯, 이 아이들 역시 너와 함께 한 흔적들은 새긴 채로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다.”

 루스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으로 달려오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아, 이 아이들은 이미 내 삶에 자신들을 새겼구나.

 이대로 돌아가면 나도, 아이들도 서로를 잊을까 하는 무의식이 발걸음을 이끌었구나.

 

 삼신할미는 루스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가, 잊지 마라. 인간은 영혼에 수많은 인연을 새긴단다. 다른 세계에서 온 네 혼의 무게를 우사 녀석이 어찌 살펴볼 수 있었겠니. 각자가 살아가는 곳이 다르다 하더라도 이곳의 아이들은 네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은빛을 각자의 혼에 수놓듯 새겨 간직할 것이야.”

 이윽고, 손가락으로 루스의 이마에 글씨를 새겨넣었다. 하얀빛은 하나의 글씨가 되어 루스에게 스며들었다.

“앞으로의 네 삶에 있어 이들의 흔적은 언제나 함께할 게다. 이국에서 온 아이야, 걱정하지 말거라. 너는 네가 자부하듯 ‘아름답고 잘생긴 천재 대마법사’ 아니니?”

 예상치 못했던 마지막 말에 루스가 고개를 들어 삼신할미와 눈을 마주하자, 그는 밟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죠. 저는 천재 미소년 대마법사 루스 세르벨이니까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어르신께도 제 흔적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루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등을 돌려 홍길동의 집으로 향했다.

 하고 싶지 않았던 검술 연습을 묵묵히 해왔던 것도, 왕의 앞에서 독설을 내뱉은 것도 어쩌면 이곳의 아이들이 새긴 삶의 흔적이 이끈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험한 일을 당해 혼이 찢어졌음에도 이승을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며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에게 나쁘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기에 루스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시금 되돌아온 홍길동의 집에서는 전우치와 강림이 서로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나 역시 서두르는 것 아니오! 지금 처리하지 못해 악귀가 다시 숨어들기라도 하면 어쩔 생각이오?”

“그럼 그때는 우리가 먼저 미끼를 던져야지. 왕이 붙여둔 벽보 덕에 폐기한 루슬 미끼 대작전이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숨만 쉬면 해결되는 일처럼 보였소? 내 안 그래도 이번 일 때문에 이레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거늘, 여기서 일을 더 벌여서 어쩌겠단 말이오?”

“네 녀석은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아예 내가 숨도 안 쉬어도 되는 존재라고 하쇼.”

 둘 사이는 견원지간보다 나빠 항상 다투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쯤, 홍길동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태를 진정시켰다.

“자자, 이러지들 마시고. 후에 벌어질 일은 나중에 정해봅시다. 지금은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니오.”

“맞습니다. 급하다면서요. 저 혼자라도 갑니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혼자 가겠다는 거요!? 갑시다, 가서 두억시니인지 세억시니인지 조지고, 루슬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고! 깔끔히 정리해봅시다!”

 전우치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 구름을 소환할 때, 루스는 두 사람을 향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를 남겼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더 오래 있다 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겠지. 나야말로 루슬 선생 같은 인재와 함께할 수 있었기에 즐거웠다오. 돌아가서도 잘 지내시게.”

“안전한 귀환을 바라지.”

 루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전우치에게로 향했다.

“갑시다. 전갈이 온 것이 벌써 한 시진 전이오. 서두르지 않으면 또 놓칠 거외다.”

 구름 위에 올라탄 전우치는 손을 내밀어 루스를 끌어올렸다. 그가 안정적으로 구름 위에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자 전우치는 전속력으로 설악산으로 향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마치 그들의 안녕을 바라듯 포근히 빛을 내리쬐었다.

 

 

설악산 마등령.

 말의 등과 같이 생겼다는 마등령은 이미 스산한 기운에 동물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원래 악귀들이 내뿜는 기운은 스산하고 음침하지. 온 산을 휘감은 존재는 나도 처음 보는 것이지만.”

 전우치는 붉은 눈을 굴리며 산군의 기운을 찾아냈다. 달밤에 어두워진 산이라고는 하나 영험한 기운을 가진 신수의 기척조차 제대로 감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전우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외면하고 루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어둑시니까지 함께 있는 것 같구먼. 이름 그대로 주위를 어둑하게 만드는 요괴인데, 별로 큰 힘은 없네. 다만 이렇게까지 어두우면 두억시니를 찾지 못할 터인데.”

“그쯤이야 빛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대충 이 산에만 빛을 밝히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 어. 그렇지.”

 루스는 전우치의 대답을 듣고 하늘에 대형 마법진을 소환했다. 이윽고 따뜻한 빛이 퍼져 나오더니 일순 온 산을 감싸 안았다. 만조에 밀려드는 밀물과도 같이 온 산에 퍼진 빛은 삽시간에 스산한 기운을 모두 상쇄시켰다.

“역시 천재 마법사라 자부할만한 실력이네! 경이로워!”

 전우치는 흥분한 목소리로 루스를 칭찬하며 산군이 준비해 둔 듯한 야트막한 공터로 내려갔다. 캄캄한 산중인지라 전우치와 루스는 어둑시니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불부터 피웠으며, 이윽고 루스는 아이들과 개량한 마법진을 그려냈다. 마법진을 다 그리자 전우치는 목소리를 키워 두억시니를 불러내니 그 호통이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

“악귀 두억시니는 들어라! 네 놈이 찾고 있는 은백색의 도사는 이곳에 있으니 정체를 드러내 정정당당히 싸워라!”

“애초에 악귀가 정정당당하게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뭐가 됐든, 녀석이 나타나야 일을 시작할 것 아니오. 루슬 당신도 준비 단단히 해두시게. 오고 있어.”

 이윽고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름한 저고리와 바지 적삼을 걸친 아이가 나타났다. 열다섯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마치 짙은 숲의 어둠을 바른 듯한 머리로 눈을 가린 채 짐승과도 같은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웃고 있었다.

“이리 나, 를 부를 정도, 라면…순순히 죽, 으러 왔다는, 게지?”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가야금을 연주하듯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말하는 것이 아닌, 저장해 둔 목소리를 이어붙이는 듯하였으며, 깨진 징에서 들을법한 찢어지는 소리에 당장에라도 귀를 막고 싶었다. 루스와 전우치는 유혹을 뿌리치며 두억시니를 쳐다보았고, 그런 그들이 흥미로웠던 두억시니가 흙 묻은 맨발을 옮겨 마법진 속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루스는 반구 형태의 방어진을 둘렀다.

“호오. 서, 국의 도술, 중에서도 이리, 큰 것, 은, 본 적이, 없, 는데.”

“그건 당신이 미천해서 몰랐던 것 아닙니까? 자기 의지대로 말도 못 하는 존재가 이런 고위 마법을 알아챌 리 없었을 테니.”

 자신이 그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들켜봤자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절대 자신에게 유리할 리는 없었기에 루스는 강한 척하며 내면의 두려움을 포장했다. 그런 자신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괴이하게 꺾은 두억시니는 입맛을 다시며 루스에게 달려들었다.

“내, 놔라. 네, 몸을…!”

“싫습니다!”

 루스는 손톱을 세워 자신에게 달려드는 두억시니의 모습에 서둘러 칠성검을 꺼내 들었다. 흩날리는 도포자락과 함께 빛을 내는 투박하지만 날카로운 검신은 달빛을 머금어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렇, 게, 투박, 한 칼, 로는, 안 될 텐, 데.”

 두억시니는 칠성검의 자태를 훑어보곤 코웃음을 치며 손톱을 휘둘렀다. 그의 손톱은 마치 살쾡이와 같이 두껍고 날카로웠으며, 손짓 한 번에 굵직한 나무를 쓰러뜨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루스는 검신으로 그 공격을 방어하며 반격할 틈을 찾고 있었다.

 칠성검은 북두칠성의 비호를 받은 검. 그렇기에 그들의 힘이 제대로 발휘된다면 투박하던 검신은 예리하게 변할 것이고, 악한 것들의 행동을 더욱 제재할 수 있게 된다. 루스는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방어를 하며 어서 빨리 칠성검에 북두칠성의 기운이 내려앉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도, 사, 라는 자, 가, 어째서, 검으로 싸, 우는 거, 냐? 아까, 와, 같은 것, 을, 어서, 더, 보여 달, 란, 말이, 다!!”

 두억시니는 방어진을 디딤대 삼아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이내 공중제비를 돌며 루스의 등을 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루스는 바람을 일으켜 그를 밀어냈다.

“그래! 이, 거다! 더, 더, 더!! 더 보, 여줘!! 나, 를, 만족, 시, 켜봐!!”

 

 루스의 마법에 보이지 않는 벽까지 튕겨 나가 목이 괴상하게 꺾였음에도 불구하고, 두억시니는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여 루스에게 달려갔다.

“당신한테 마나 쓰는 게 아까워서 싫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두억시니를 요리조리 피하며 루스는 외쳤다. 오히려 그 부분이 두억시니를 자극한 듯, 더욱 거세지는 공격에 루스는 어쩔 수 없이 불 속성 마법을 일으켜 그에게 날렸다.

“거, 봐! 할, 수 있, 으면서! 어서, 더, 보여, 줘! 다, 소모해!! 그리고, 나서….”

 두억시니는 기쁨에 겨워 팔짝팔짝 뛰더니 자신의 몸을 키웠다. 이윽고 까만 머리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산만 한 덩치를 가진 붉은 머리의 도깨비가 나타났다. 이 모습이 바로 그의 본 모습인 것이다. 마법진 바깥에 서 있었기에 루스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전우치가 이를 눈치채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에게, 몸, 을! 바쳐, 라!!”

“루슬, 조심하게! 두억시니는 원래 사람의 머리를 으깨어 죽이는 악귀라네!”

“아니 그 중요한 걸 왜 지금 알려줍니까!?”

 루스의 원망 어린 목소리에 흥이 오른 두억시니는 성큼성큼 뛰어다니며 루스를 붙잡으려 했으나, 커져 버린 덩치에 순발력이 떨어진 그 덕에 루스는 겨우겨우 도망 다닐 수 있었다. 루스의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리던 은빛 도포는 마치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 하였고, 오히려 그런 부분이 두억시니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때, 칠성검이 예리한 빛을 띠며 그 검신의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황금빛의 납작했던 검은 얇고 예리하며, 단도의 형태로 변했고, 루스는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마도구에 마력을 주입하여 두억시니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변, 하기, 도, 하는, 군. 그 검…. 으악!?”

 코웃음을 치며 칠성검을 바라보던 두억시니가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음에 당황한 순간, 루스는 단전에 힘을 주고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 언젠가 리프탄과 헤바론의 대련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니르타 경, 그런 도약은 어떻게 합니까?’

‘뭐, 단전에 힘을 주고 땅을…. 이렇게! 박차면 되는데?’

‘경에게 질문한 제가 바보였습니다.’

 

 그 큰 덩치를 가지고도 어떻게 그리 높게 뛰어오를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던 루스는 헤바론에게 물었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그의 조언대로 도약하니 과연 그가 말한 그대로였다.

“이거나 먹고 사라지십쇼. 저도 집에 좀 갑시다. 리프탄 경이 저에게 넘긴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루스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검을 찔러넣었다. 연습해왔던 바와 같이, 갈빗대의 사이에 검을 눕혀 찔러넣었다. 바닥에 발을 붙이며 검을 바라보니, 도깨비의 질긴 가죽에 깊게 박히지 못한 채 오히려 그를 자극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움직임의 봉쇄가 풀린 두억시니는 자신의 신경을 긁어대는 은백색 나비를 쫒아내기 위해 날뛰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죽을 거, 그리 날뛸 필요 없, 다니까요!”

 인사불성으로 날뛰는 그에 의해 방어 마법진은 깨졌고, 하마터면 그의 큼직한 발에 압사당할 뻔한 루스는 발견한 전우치는 도술을 부려 두억시니를 제압했다.

“네, 놈! 어떻, 게, 내 가죽, 을 뚫…!”

“네 놈이 코웃음 치며 무시한 그 검이 성검(聖劍)이니 그런 거 아니겠냐. 루슬, 마무리는 지어야지.”

 루스는 뻐근해진 손목을 털어내고는 두억시니의 심장 부근으로 향했다.

“안타깝, 다…! 네 놈만 삼, 켰다, 면! 진정한 신, 이.. 될 수 있, 있을 터인데…!”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았으면 신이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악귀의 왕이 되어놓고, 신이라니, 우습지 않습니까?”

“네, 놈…!!”

 가볍게 경련하는 오른손을 털어낸 루스는 두 손으로 검자루를 거머쥐고는 가차 없이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다. 두꺼운 가죽을 뚫고 심장을 찔러낸 검은 미약하게 박동하는 악귀의 심장에 반응하며 잘게 진동하였다.

“크아아아악!!!”

“심장만 있으면 재생할 수 있다니, 이 무슨 생명력입니까? 사람 말도 제대로 이해 못 하면서 신이 되고자 한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크윽, 뭐, 라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공기 중에서 잿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잘게 진동하던 칠성검은 아직 흘러나오지 못한 피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지, 어둑시니의 심장박동처럼 맥동하더니 움직임을 멈췄고, 어둑시니는 숨을 거두었다.

“무당은 ‘취하라’고 했지, 죽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애초에 ‘취하다’에 살인의 의미가 들어간다고는 해도, 예언이라는 게 원래 해석하기 나름 아닙니까?”

 들어도 듣지 못할 두억시니에게 대답한 루스는 칠성도를 뽑아낸 후 찝찝한 기분에 한차례 털어낸 후 검을 갈무리하였다.

“거참, 허무할 만치 간단히 끝났구먼.”

“그렇게 쉬워 보였으면 우사님이 하시지, 왜 저를 시킵니까? 애초에 마법진 밖에 계셔서 잘 모르셨겠지만 저는 죽을 것 같거든요?”

 막바지에는 그가 구해주긴 하였으나, 따지고 보면 자신이 처리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루스는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던 두억시니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망가졌으니 그가 부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간다면 언젠가 또다시 자신을 찾을 것만 같았기에 그는 장작을 하나 가져와 불을 붙이더니 두억시니의 시신 위로 던졌다.

 타오르는 불꽃은 이윽고 두억시니의 전신을 삼켰고, 루스는 그 시체가 재가 되면 저절로 불이 소멸하도록 마나의 흐름을 조정하였다.

 

“뭐합니까? 두억시니도 사라졌겠다, 저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가끔 루슬 자네가 악귀가 아닌지 의심되기도 한다네.”

“이렇게 착한 사람이 악귀일 리 없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역소환진이나 그려주십쇼.”

 전우치는 루스의 태도에 진저리치며 나뭇가지를 주어 들더니 바닥에 역소환진을 그려나갔다.

“중앙에 칠성검을 내리꽂으면 될 거요. 나 참, 이렇게 부려 먹는 건 강림 차사 말고는 없을 줄 알았건만!”

 루스는 그런 전우치의 혼잣말을 무시하고 검집에서 다시금 칠성도를 꺼내 들었다. 힘을 다 쏟아낸 것인지 검신은 이전과 같이 투박한 황금색으로 변해있었다. 아름다웠던 은빛 도포는 여기저기 찢어졌고, 어떤 곳은 루스의 마법이 스쳤는지 그을리기도 하였다.

전우치는 그런 루스를 흘긋 바라보고는 지쳤다는 듯 손을 휘저어 루스에게 안녕을 고했다. 

“다신 보지 맙시다. 수려한 미남자들이 여럿 있으면 균형이 깨질 테니”

“옳으신 말씀.”

 루스는 칠성검을 내리꽂기 전, 허리춤에서 검대를 풀어내더니 작은 주머니와 함께 전우치에게 건넸다.

“이건 뭐요?”

“아이들이랑 함께 만들었습니다. 홍길동 님 것도 있긴 한데…. 전해주십쇼. 그간 고마웠습니다.”

 루스는 쑥스러운 듯 전우치에게 물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후 곧바로 역소환진의 중앙에 칠성검을 찔러넣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곳에 올 때와 같은, 따뜻한 흰 빛이 그의 몸을 감싸 안았고,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백광이 내리쬐며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대야말로.”

 흩어지듯 전우치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루스는 눈을 감았다.

 

 

 쿠당탕-!

 루스가 알려준 대로 마법식 계산에 열중하던 맥은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앞에서 턱을 괴고 계산과정을 바라보던 루스가 돌연 바닥으로 쓰러진 것이다. 서둘러 그의 곁에 가 상태를 살펴보는 맥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하였다.

“루, 루스!? 괘, 괜찮아요!? 조, 졸다가 너, 넘어진 건가요!?”

“..예? 졸아요? 제가요?”

 어깨를 두드리는 맥의 손길에 눈을 뜬 루스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눈에 익은 도서관의 풍경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자신이 졸았다는 맥의 발언에 의구심을 품었다.

 분명 자신은 방어 마법진의 시범을 보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로 이동되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후, 칠성검의 도움을 받아 아나톨로 돌아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신의 눈앞에 있는 맥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루스를 살펴보았다.

“귀부인께 마법진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마법진을 펼치다 역소환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닙니까?”

“그, 그럴 리가요. 마, 마법식을 알려준 후에는…채, 책상에 턱을 괴고 잠들었잖아요! 요, 요즘 통 잠을 못 잔다고는 들었지만…이, 이정도일 줄은…! 제, 제가 리프탄에게 말해서 루스의 휴, 휴식 시간을 늘려달라고 할게요…!”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은 전부 꿈이었다는 것이다.

 하긴, 천재 미소년 마법사가 아무리 과로했다고 해도, 마나의 흐름 하나 제대로 제어 못 할 리 없다. 루스는 제 생각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맥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제가 요즘 피곤하긴 했나 봅니다. 꿈도 꾸고. 심려를 끼쳤습니다. 귀부인은 어서 계산을 끝내주십쇼.”

“아, 알겠어요!”

 찌뿌둥한 고개를 돌리며 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키자, 손목에서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마도구는 두억시니와의 전투가 꿈이 아니었다는 듯,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루, 루스! 거기 말고 여, 여기서 좀 쉬는 건 어, 어때요!”

“그럼 부인의 배려에 잠시 쉬겠습니다. 요 며칠 통 잠을 못 잤거든요.”

 루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털어내며 맥시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목에는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고 외치듯, 그 후로도 오랜 시간 동안 청금석의 팔찌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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