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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는 바람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창문은 바람에 덜컹거린 것뿐이었고, 어디에도 그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천천히 잠을 털어냈다. 아직 늦은 밤이지만 다시 잠들고 싶지 않다. 아, 오랜만에 그 꿈을 꾼 것 같다. 특별한 사제, 그와 만난 첫 순간의 꿈을.
꿈 내용을 찬찬히 떠올려본다. 알 수 없는 곳으로 팔려나가기 직전, 지하실에 들이닥친 오시리아 성기사단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햇볕, 지하를 빠져나가니 폐부로 들이치던 신선하고 따가운 찬 공기와 짐차에 실어져 느끼던 길의 거친 표면, 오랜만의 제대로 된 음식과 물을 받아들이던 몸의 감각과 감정, 함께 구출된 사람들과 뒤엉켜 누워 홀로 밤을 지새우며 했던 복잡한 생각들이 지나치게 생생했던 꿈.
그 꿈의 말미에는 항상 오시리아 근방에서 자유를 위해 난생처음으로 감행한 탈출이 허망하게 가로막혔던 그 순간의 기억이 강렬하게 되풀이되었다. 주변을 확인하고 철장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뒷덜미를 잡아채던 무자비한 손길, 그리고 밤하늘보다도 어두컴컴했던 녹빛 눈동자.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던 그 깊은 눈동자에 빠져들었던가. 나도 넋을 빼고 그를 마주 보았던 것 같다. 그 눈동자는 꿈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텅 비어있었다.
아마 나는 그 눈동자를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한기가 돌아 책상 옆의 바구니에서 담요를 꺼내 둘렀다. 침대로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잠시만 책상에 엎드려 감정을 갈무리하고 싶을 뿐이다.
책상에 엎드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보인다. 구름이 꼈으나 달이 밝은 탓인지 지나치게 선명한 나무의 움직임이 이질적이다. 그렇게나 흔들리는데도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이 미련하다. 나무에서 시선을 떼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벌써 수년이 흘렀음에도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이 집 안으로 처음 들어왔던 날의 낯섦과 묘한 두근거림. 남들처럼 돌아올 곳이 생겼다는 기쁨을 숨기느라 무던히도 애썼던 나. 아직도 그가 나를 도와준 이유는 듣지 못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성기사단에서 나눠준 빵 두 조각을 가지고 도망치려던 더러운 발본 여자를 일행에서 몰래 빼내어 오시리아 서쪽령 어느 거처에 살게 해준다던 그 제안을 당시의 나는 쉽게 믿지 못했다. 나를 빼내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어보며 거침없이 적대감을 드러내자 위협적으로,
'나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라고 경고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는 왜 나에게 높임말을 사용했을까. 이 또한, 이제는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그가 나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 신분과 외곽의 작은 집을 내어주며 그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구해주겠다고 말했다. 직물을 짤 베틀을 구해다 달라고 했을 때도 그는 나를 신기한 물건인 양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굳이 일하며 살아야겠습니까?'
라고 물어볼 정도로 편의를 봐주려 했다. 내 편의가 자신의 의무라도 되는 양 굴던 모습이 되려 불편했으나 드디어 주어진 평범한 삶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염치없이 그의 호의에 매달렸다. 그렇게 나를 이곳에 정착시킨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번, 지금 같은 야심한 시각에 나를 찾아오곤 했다. 처음 그가 왔을 때는 거대한 뱀 앞의 작은 짐승이 된 양, 겁먹고 힘껏 노려보던 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에게 일주일간 지냈던 이야기들을 떠들어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도가 변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위협적인 분위기로 소리 없이 들어와서는 허락 없이 의자에 앉아 내 이야기를 마치 보고받듯이 경청하던 그는,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린 듯 앉아있던 자세에서 다리를 꼬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했다. 살림살이를 둘러보고는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의외로, 할 말이 떨어진 내가 가끔 그에 대해 질문하면 특유의 작고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곤 했다.
이름은 쿠아헬 리온. 당시 기사 서임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 사제라는 것만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 나는 그 사람이 좋았다.
그는 가끔 지쳐 보일 때가 있었다. 힘든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가당찮다는 듯이 나를 내려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했지만, 결국 내 권유대로 침대 위로 올라와 벽에 등을 대고 서로의 어깨를 의지한 채 앉아있기도 했다. 때때로 그가 뒤에 앉아서 나를 감싸 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도 했던 침대. 바로 저 침대에서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서로의 존재에 위로를 받았다. 분명 그랬다.
"...쿠아헬."
움직이지 않는 혀를 겨우 굴려 이름을 불러본다. 쿠아헬, 쿠아헬. 이름을 발음할 때 혀끝이 말리는 것이 좋았다. 이름을 시답잖게 반복해 부르면 그는 그저 고요하게 듣고만 있었지. 한번은 대답해 줄 법도 한데, 그는 그저 그렇게만 있었다. 그와 함께 앉아있던 침대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차오른다. 저번 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까닭도 있다.
'이제 못 올 겁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
'드래곤 토벌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출정은 한 달 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드래곤이라뇨? 맙소사, 당신... 이제 못온다는, 그런 불길한 말은 왜 하는 거예요.'
그는 말없이 전의 그 텅 빈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알고 있다. 수년이 지난 지금, 그는 더이상 촉망받는 어린 사제가 아닌 성기사단장이고, 나는 그저 직물 파는 출신 불명의 평민일 뿐이다. 그가 이제 와서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쿠아헬은 충성스러운 사도이니까, 혹시 모를 싹을 잘라내고 싶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겠지.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이 흐르고야 만다.
책상에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대충 눈물을 닦아냈다. 책상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싸구려 보석함이 보인다. 아까 잠들기 전, 서랍에서 꺼내 보던 상자다. 햐얀 반지 한쌍이 나란히 들어있다. 아무런 무늬도 장식도 달려있지 않은, 그저 그런 반지다.
언젠가, 이 집이 그가 남몰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마련해 놓고 종종 들려오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혼자 설레발로 사놓은 반지다. 나는, 나는... 우리가 우리인 줄 알았으니까. 서로 온기를 위로 삼아 함께했던 시간들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기회를 봐서 나눠 가질 생각이었다. 눈치 없이 사제에게 그 주에 마을에서 열린 결혼식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다. 이젠 다 부질없지만.
그래, 그의 손에 이런 싸구려 반지가 가당키나 한가. 스스로를 설득하며 반지를 가만가만 쓸어보다가 뚜껑을 덮었다. 흩날리던 꽃잎들과 각종 색종이, 반지 교환과 사랑스러운 부부의 탄생 따위의 것들을 떠들던 내 상기된 표정을 보는 그의 눈빛이 어땠더라. 하필 그게 기억나지 않는다.
드래곤 토벌이라니. 드래곤이라니, 어쩌다 마을에 내려가면 전해 듣는 마물에 대한 얘기도 끔찍했는데 드래곤이라니. 그의 강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의 태도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만약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그게 쿠아헬 리온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 된다면? 나는 남은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미 그는 나의 전부인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불에 덴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 이제야 인정하다니, 그가 나의 전부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를 당장 만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창밖은 바람이 몰아치고 있고 그는 칠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에 있다.
다시금 충격적인 현실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떠나기 전에 한 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 절대로 저번 같은 시간낭비는 하지 않을 텐데. 쿠아헬, 그가 너무, 보고 싶다. 나는 바보같이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제발, 나를 보고 계신다면 한 번만 더 그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내 기도가 이기적이라는 걸 압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의 평안을 마주 보고 기도해 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발... .'
그때, 갑자기 쾅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다. 천둥 같은 소리에 놀라 책상 위에 있던 반지를 급하게 치마 주머니에 감추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그만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시선을 고정했다. 쿠아헬 리온.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그가 금빛 안광을 빛내며 서 있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했는지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쿠아헬, 쿠아헬... ."
"울고 있었습니까?"
감사의 기도를 중얼거리며 훌쩍이자 머뭇거리던 그가 담담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한차례 등을 쓸어내려 주고는 천천히 나를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살피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다. 자신 때문에 울었다는 것을 당신은 알까? 이유도 묻지 않고 엄지로 눈물을 살짝 훔쳐주는 사제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진다.
"다시는 안 온다고 해서, 그래서...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갈 곳이 있습니다."
"네?"
"시간이 없습니다. 가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해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익숙하게 망토를 찾아 둘러주고는 팔을 잡고 집을 나선다. 나무에 매어 둔 말에 순식간에 나를 들어 앉히고는 자신도 안장 위로 뛰어오르더니 곧바로 말을 힘껏 달렸다.
세상에 남은 소리라고는 귓가에 스치는 바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 그리고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구별되지 않는 커다란 심장 소리뿐인 것 같다. 우리가 울림을 공유하고 있는 게 맞을까, 이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어딜 가는 걸까. 혹시 도망이라도 가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는 충직한 사제이니까.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임을 내팽개칠 리 없다.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이렇게 사람 마음을 다 갉아놓고 돌아와서는 다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는 이런 식이었다. 그래. 나는 이런 쿠아헬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얼마나 달렸을까, 그가 말의 속력을 서서히 줄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소리가 하나둘씩 돌아온다. 도착한 곳은 낡은 오두막이었다. 아마 오래전, 사냥꾼들의 거처였을 법 한 모양새다. 그는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걸까. 의구심에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창문으로 빛이 세어 나오고 있다. 누군가 있는걸까.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훈기가 추위에 언 몸을 감쌌다.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다.
오두막 전체가 꽃으로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고, 입구에서부터 붉은 카펫으로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눈으로 따라가 보니 카펫의 끝, 오두막의 중앙에 나무로 된 작은 사각형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정갈한 과일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예배당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커다란 하얀 천으로 가려진 공간이 있었다. 마치 의상실의 탈의실 같은 공간이었다. 그가 그 공간으로 가더니 천을 확 걷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커튼 뒤에는 순백의 드레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언젠가, 그에게 들뜬 목소리로 조잘거렸던 그 디자인과 비슷한, 드레스였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암녹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빛 때문일까. 어쩐지 그가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다. 그가 작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갈아입고 나오세요."
가슴에 울렁거림이 퍼진다. 드레스 앞으로 다가가니 쿠아헬이 커튼을 다시 쳐준다. 떨리는 손을 들어 옷을 쓰다듬어 보았다. 평생 꿈도 꿔본 적 없는 부드러운 촉감의 고급 소재임이 느껴진다. 반소매가 사랑스럽게 부풀려져 있고 치맛자락은 하늘하늘 떨어진다. 화려한 무늬는 없지만, 평생 다시 만져볼 수도 없을 드레스임이 틀림없다. 내 말을 기억 해두었던 거야. 차오르려는 눈물을 누르며 드레스로 갈아입고 보니 구석에 신발이 놓여 있었다. 낮은 굽의 단정한 하얀색 구두였다. 구두를 갈아 신고 급하게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콧잔등이 시큰해져 온다. 이제는 이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벗어놓은 치마 주머니에서 보석함을 꺼내 쥐고 심호흡을 몇 차례 한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커튼을 젖히자 어느새 예복을 입고 테이블 앞에 서 있는 쿠아헬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옷은 어느새 갈아입은 걸까. 저럴 거면 빨간 카펫은 왜 깔아 놓은 것인지. 금실로 무늬를 수놓은 단정한 흰 예복 차림의 그가 반짝거린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한발, 한발,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도 내가 다가가는 동안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사무친다.
짧지만 길었던 걸음 끝에 드디어 그와 마주 보며 섰다. 언뜻 보면 금실 같은 쿠아헬의 황갈색 머리칼과 새하얀 예복이 잘 어울려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인다. 이렇게 마주 보고 서 본 게 얼마 만인지. 첫 만남 때보다 부쩍 자란 서로의 키가 함께한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다. 몇 년간 봐왔던 단정한 이마도, 대게 무감각한 감정을 띄고 있던 눈동자도, 잘생긴 콧날과 무뚝뚝한 입도. 전부 눈에 그대로 그리듯이 훑어보았다. 꽤 오래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도 그는 말 한마디 걸어오지 않았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지금 우리 결혼식 중인가요?"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괜찮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를 알고 지내며 처음 보는 어딘가 복잡한, 따뜻한 눈빛이 나를 향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참던 눈물이 결국 차오른다. 그래, 누가 말을 뱉든지 그게 중요한가. 입 밖으로 내뱉어 확정 지으면 그만인 일이다. 그가 사제이기에, 신의 눈과 귀를 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니 내가 하면 된다. 내가 사랑하니까.
테이블에 장식되어있는 꽃을 한 송이 들어 쿠아헬의 부토니에로 꽂아주었다. 그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똑같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내게 건넨다. 나는 그것을 빈손으로 받아 들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부케인 양 들고 활짝 웃어 보이고는 감추고 있던 보석함의 뚜껑을 열어 쿠아헬에게 내밀었다. 그가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뜬다.
"리온 경, 부족하지만 받아 주세요."
내용물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미동했다. 전에 없던 일이다. 그가 반지를 들어 내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그래. 이거면 됐다. 나는 이거면 충분하다. 이제는 이 반지가 부끄럽지 않다. 나도 그에게 반지를 끼워주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다. 몇 번 잡아본 손이지만 새삼스럽게 크고 투박하다. 손을 잡은 김에 짧게 기도를 올렸다.
'부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축복하시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보호하소서.'
모순적인 상황이지만 신이 쿠아헬을 사랑하시니 내 기도도 들어주시겠지. 기도를 마치고 그의 반지에 살짝 입 맞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 넣었다. 우리는 딱 테이블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고요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우리의 시선이 드디어 오롯이 서로를 향한다.
축복을 읊는 사제도, 축하를 건네는 하객들도, 흩날리는 꽃잎과 색종이도 없지만 괜찮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오두막 바깥의 부엉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한데 엉겨 마치 우리를 위한 결혼 행진곡인 양 들린다.
나는 이 근사한 순간을 영원히 그릴 것이다.
사랑하는 신의 사제와, 그림 같은 이 순간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