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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t First Sight  

재단사

"아가씨!"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북부에 위치한 리바돈에도 결국 물의 계절은 찾아오는 것인지, 창문을 넘어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는 따뜻한 기운이 가득 묻어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조금 나른한듯한 날씨에 침대에 누워 눈을 끔뻑거리고 있던 방 안의 여자는 들려오는 호들갑 소리를 들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 진 것 같은 육중한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중년의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 유모?"

"... 아아..."

 

방으로 들어온 그녀의 유모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벽에 얌전히 걸려있는 새하얀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바라보며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처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아아, 아렌 경께서..."

 

세주르 아렌. 곧 나의 남편이 될 사람.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그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아렌 경께서... 오시는 길에..."

 

혹시 그이가 변이라도 당한 걸까?

 

"... 오는 길에...?"

"... 도, 도망치셨답니다."

 

아아, 세주르. 소문이 무성한 내 약혼자가 결국엔.

 

"이를 어쩌면 좋아요. 불쌍한 우리 아가씨."

"... 정말."

"결혼식이 당장 내일인데, 우리 아가씨... 하얀색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셨는데."

"... 아, 이런, 정말."

 

정말, 

하늘은 제 편임에 틀림없었다. 

 

 

버림받은 것이 자신인 양 슬퍼하는 유모가 대책을 마련해봐야겠다며 나가고, 혼자 남은 여자는 다시 넓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천천히 몸을 틀어 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도 모르게, 입가에는 미소를 가득 담았다. 

 

아주 어린 시절, 유모가 읽어주었던 책에 나온 것처럼 멋진 남자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둘만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란 기대는 저버린 지가 오래였다. 하지만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과의 결혼도 그녀에게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천재 검술가라는 것, 그리고 리바돈을 살린 위그루의 현신이라는 것 정도. 

 

"내가 그와 검을 겨룰 것도 아닌데, 그것이 결혼과 무슨 상관이라고."

 

그녀의 아버지는 혼담이 들어오자마자 드디어 우리 가문이 명예를 드높이게 되었다며 급하게 결혼을 추진했다. 딸의 행복이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하게 시간을 좀 더 주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얼굴을 모르는 사내와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못해."

 

그녀는 베개에 파묻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아마도 유모가 그녀를 보았다면 불안에 떨며 아버지의 기사들을 불렀을 것이다. 그녀가 별안간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먼저 도망친 건 그쪽이야."

 

여자는 침대 밑을 더듬거리다가 귀족 영애가 신을 것 같지 않은, 먼지가 쌓인 가죽 장화를 꺼내 신었다. 그리곤 굳게 닫힌 철문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위험한 행동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셨겠지. 그러니 이렇게 창문이 큰 방에 날 가둬두신 거야. 

 

"... 그러니까 아버지,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창문으로 다가간 여자는 고개를 쑥 빼고 밑을 바라보았다. 타고 내려갈 만한 것이 있나 주변을 살피다 눈에 들어온 것은...

 

"... 정말 제 잘못이 아닐 거예요."

 

내일을 위해 만들어진 웨딩드레스였다. 

 

 

치마를 쭉쭉 찢어 만든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녀는 위기상황에 놓여있었다. 높이를 가늠하지 못했던 것인지, 밧줄은 끝이 났지만 그녀가 안전하게 땅에 닿기에는 아직 거리가 남아있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면 당장 들키겠지. 그럼 다음 신부대기실은 탑 꼭대기일지도 모른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시 위로 올라갈지, 팔이 부러지더라도 밑으로 뛰어내릴지를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망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의 하인이 나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기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밑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유분방하게 자란 고수머리가 눈에 띄는 낯선 남자였다. 그녀는 머릿속을 헤집으며 그를 본 기억이 있는지 생각했다. 

 

"누구신가요?"

 

나름 아버지의 하인들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묻는 말에 대답을 않는 것은 귀족 아가씨에게 조금 무례한 짓이기는 하나, 그녀는 지금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밑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웃은 걸까? 정말 무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용서하자, 용서해야 한다.

 

"도... 도와...!"

 

투둑. 그때 엉성하게 묶여있던 연약한 웨딩드레스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그녀는 밑으로 추락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프려나? 뼈가 부러지려나? 아니면, 정말 최악의 경우 죽을지도?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고...

 

"이렇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생각이 끝나고 눈을 떠서 처음 본 것은 바로,

 

보기 좋게 구불거리는 흑갈색 곱슬머리, 조금 그을린 피부와 아래로 처진 눈꼬리, 그리고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 

 

그녀는 조금 멍하게 한동안 그의 품에 안겨있었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낯선 사람의 품에서 벗어난 그녀는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옷을 정리하는 척을 했다. 귀족 영애가 낯선 이와 같이 있는 것만 해도 유모는 기겁을 할 것이었고, 만약 그녀가 낯선 남자의 품에 잠시 안겨있는 것을 가문에서 알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파혼의 사유가 될 지도 몰랐다. 

 

파혼. 파혼이라. 솔깃한 단어였다. 지금 당장은 파혼을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영원히 자신의 사랑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식은땀이 축축하게 베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조금 더 고르는 척하며 자신의 앞에 선 낯선 사람의 구두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 안 가세요?"

 

하지만 그 낯선 사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눈치 없는 자는 자신이 귀족인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무례하게 대한 걸까? 하긴, 귀족 영애가 창문으로 탈출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나를 시녀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만약 내 꼴을 아버지가 보셨다면 감금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겠지만. 

 

그렇다면 이 남자는? 

 

그녀는 그의 옷차림을 훔쳐보았다. 아까 품에 안길 때 이방의 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아버지의 시종은 아닐 것이다. 그는 내일 결혼식을 위해 참석한 사람이 맞다. 그렇다면 누굴까? 잘생기고 부티 나는 얼굴을 보니 귀족일까? 하지만 귀족이 이렇게 남의 성 뒤뜰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걸까? 근육질의 몸을 가졌으니, 설마 기사? 아렌 가문에서 온 기사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자신 앞을 떠나지 않고 있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더 도와줄 것이 있어 보여서."

"... 아니."

"있을 것인데."

 

조금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황당한 것도 잠시, 그가 제안하는 것에 그녀는 솔깃 넘어가고 말았다. 

 

"성을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마치 성을 자주 들락날락한 사람처럼 거침없이 앞장섰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열심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등 뒤에선 향긋한 바람 냄새가 났다. 비누 냄새가 살짝 나는 것을 보니 기사들 중에서도 높은 서열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턴 길이 조금 험합니다. 자, 여기를 잡으시죠."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놓인 손을 쳐다보았다. 굳은살이 촘촘하게 박힌 손. 잘생긴 얼굴에 비해 험하게 자라난 것 같은 그런. 잡아도 될까.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 저 손을 잡으면 무엇인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만 같아. 

 

"... 고마워요."

 

하지만 결국 남자의 재촉하는 듯한 표정에 손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손을 잡으니 조금 느려진 그의 발걸음에 그녀는 자신이 숨을 헐떡이며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향긋한 바람과 따뜻한 손, 그리고 생소한 거리.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에 조금 숨이 찼다. 

 

"저기로 가면 시장입니다."

"그렇군요."

"같이 갈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은 끄덕임이었다. 가끔 유모와 마차를 타고 시장을 지나다닌 적이 있었다. 그 얇은 나무판자 사이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얼마나 궁금하던지. 그것을 마차 밖에서 보는 것은 정말 처음이라 그녀는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제가 좋다고 해도 아직 제 손을 잡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네?"

 

그녀는 아직도 그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가 한발짝 빠르게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 매력적인 웃음을 얼굴에 띄며 조금 어지러운 말을 내뱉었다. 

 

"여긴 사람이 많고 복잡하니, 이렇게 손이라도 잡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제가..."

"그러면 여기부터 구경하시겠습니까?"

 

넉살 좋게 웃은 그가 그녀를 이끌었다. 아무래도 모든 게 처음이니까 이런 거겠지. 그리고 난 지금 귀족 영애가 아니니까, 남자의 손을 잡는 건 괜찮은 일일지도.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연인이라고 생각할지도. 연인. 연인. 저런 남자라면 내가 좋아할 수 있을까. 그와 내가 연인이라.

 

"여기가 이 근방에서 제일 맛있는 식당이라는군요."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가 또 웃었다. 침이 괜히 꿀꺽 삼켜졌다. 이건 아마도 그가 데리고 온 곳이 맛있는 식당이어서일 것이다. 

 

"앉으시죠."

 

그가 앞장서서 그녀를 데려간 곳은 조금 구석진 자리었다. 멀뚱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의자를 먼저 빼준 그는 그녀가 감사의 인사로 치맛자락을 들었다 놓자 또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문을 받으러 나왔다. 

 

"여기서 가장 맛있는 것으로 내어주시오.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군. 아, 금액은 상관하지 마시게. 넉넉하게 드리겠소."

 

그 말을 들은 주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를 다시 힐끔 쳐다보았다. 주워듣기로 고위기사들은 봉급을 어마어마하게 받는다지? 그는 고위 기사일까? 고위 기사라면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으실 것 같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것을 맞은 편에 앉은 남자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알려주지 않으실 겁니까?"

 

또 다시 정중한 말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음식이 나오자, 그가 접시를 가져갔다. 그녀는 멍하니 그가 정교하게 자르고 있는 고깃덩어리를 쳐다보았다. 

 

"한입 드셔보십시오. 맛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그가 포크로 고기 한덩이를 찍어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가 손을 뻗었다. 

 

"아니, 입을 대라는 말이었는데."

"나, 남사스럽게."

"뭐가 어떻습니까? 우린 귀족도 아닌데."

 

아, 귀족이 아닌 척을 해야 했다. 그녀는 눈을 꾹 감고 '자기는 더이상 귀족 영애가 아니다'를 세 번 되뇌고 입을 벌렸다. 입안 가득 기름진 고깃덩어리가 들어왔다. 아주 부드러워 혀와 입천장으로도 부스러지는 고기였다. 게다가 소스는 또 얼마나 감칠맛이 도는지, 눈이 번쩍 떠졌다. 

 

"어떻습니까?"

"맛있어요!"

 

하하, 그가 또 웃었다.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가 반쯤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웃을 때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움직인다. 식당에서 들려오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건 분명 저 노랫소리가 감미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잘라놓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식사도 했으니, 이제 어딜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까?"

"저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귀족 영애였고, 영지를 돌아다닌 적은 아주 적었으며, 사실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잘 알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옷을 입은 기사무리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익숙한 옷은 아버지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 성에서 자신이 도망쳤다는 것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광장에서 연극이 열립니다! 리바돈에서 제일가는 악단들이 펼치는 공연! 소문으로는 리바돈의 국왕께서도 이 공연을 보셨다는 소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앞에 서 있는데 귓가로 누군가 크게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조금 간절하게 그를 쳐다보자, 모든 것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가 미소 지었다. 

 

"가볼 곳이 생겼군요."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여기를 피해야 한다. 

 

"하하하! 너무 재밌어요!"

"그렇게 재밌습니까?"

"그쪽은 저게 안 웃겨요?"

"그쪽?"

"아하하하!"

 

그녀는 아까 기사 무리들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웃었다. 연극은 그녀의 마음에 꼭 들었다.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기를 하는지, 그녀는 웃느라 숨이 모자랄 정도였다. 

 

"너무! 너무! 재밌었어요."

"동행자를 잊어버릴 정도라니 정말 폐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셨을지도 모르겠군."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할 수가 있는지."

 

아주 짧은 공연이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재잘재잘 연극에 대한 말을 하며 그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그녀는 공연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뒤에서 들려오는 다그닥거리는 말 소리를 듣지 못했고, 갑자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두 번째로 그의 품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주 위험한 공연이군. 이렇게 사람 정신을 빼놓다니."

"아니, 저... 그게."

"제가 당신을 또 구했군요."

 

그의 품에 안기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훨씬 크고 몸이 다부졌다. 그녀는 입을 꾹 닫았다. 방금 본 재미있었던 연극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 연극이?"

"... 재밌었다구요."

"오늘 그대를 많이 도와드리는 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감사를 표시한 그녀는 그의 품을 빠져나와 다시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그는 나를 많이 도와주는구나.

 

"두 분! 보기 좋습니다, 아주!"

"하하, 그렇습니까?"

"지금도 보기 좋지만, 자, 여기 이 행운의 팔찌를 차면 연인들은 헤어지지 않고! 어린 아이들은 탈이 없고 건강하고! 장사꾼들은 돈을 많이 벌게 되고!"

 

어색해진 공기를 뚫고 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자신이 들어도 저 깡마른 상인이 하는 말은 장사치의 언어였다. 가끔 제 성을 들락날락하는 상인도 비슷한 향기를 풍겼다. 그런 건 유모가 새겨듣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두 개 사겠소."

"네? 저걸요?"

 

옆에 있던 남자는 그 말에 홀랑 넘어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만류할 목적으로 목소리를 키웠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사꾼에게 걸어갔다. 물론, 그녀의 손을 이끌고. 그는 배려깊고 다정하지만, 귀가 얇은 사람이었어. 

 

"자, 이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실 겁니다, 두 분."

 

상인이 찰랑거리는 동전을 받아들고 팔찌 두 개를 내어주었다. 그는 불쑥 팔찌 한 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팔찌를 받아들었다. 

 

"감사..."

"아니, 제 것을 메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녀의 앞에 햇살에 잘 그을린듯한 팔뚝이 내밀어졌다. 그는 행운의 팔찌를 왜 산 걸까? 기사들이 은근 미신을 잘 믿는 걸까? 죽기 싫어서? 아니면 정말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며 그녀는 팔찌를 묶어주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한쪽 팔찌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두 개를 달라고 들었는데, 하나는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는 걸까. 살짝 기분이 우울해졌다.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그들은 시장을 걸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서 길에서 파는 고기 꼬치를 나눠 먹었고, 신발가게에 들어가 여러 신발을 신어봤다. 그녀는 아버지의 기사무리들을 마주칠 낌새가 보이면 우왕좌왕했고, 그때마다 그는 뭐라도 아는 것이 있는 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끌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맨 어깨에 닿을 때마다 온 몸의 감각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시장을 빠져나와 노을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앉았다. 어느새 둘 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설렘, 그리고 편안함. 두 단어가 공존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해가 떨어지면 추울 겁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옷도 자신의 것만큼이나 얇았다. 

 

"아까 담요를 사 올걸 그랬어요."

"그러게요."

 

해가 떨어지면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대로 영영 떠돌아다니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한 그녀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성을 빠져나오는 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도망친다면. 그래서 아렌 가문에서, 그리고 내 가문에서 추적에 나선다면, 제가 아닌 이 남자까지도 위험해질 거라는 건 당연하였다. 

 

예정대로라면 그녀는 내일 세주르 아렌과 결혼하게 될 것이다. 사랑도, 애정도 없는 그런 결혼생활을 하며 그녀는 평생 오늘만을 그리워할지도 몰랐다. 후회하겠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있잖아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건 눈앞에 보이는 핑크빛의 노을 때문에 감성이 풍부해져서 일지도, 아니면 벌써 메마른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낙담일지도 몰랐다. 

 

"그리울 거예요."

 

당신이. 이 순간이. 

 

"저 내일 결혼해요."

 

당신처럼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어떤 남자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결혼 상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근데..."

 

아니 벌써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저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은 것 같아요."

"어떤 사람?"

"... 당신."

 

푸흐흐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훌쩍이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초록색 눈동자는 분명 애정에 차 있었다. 유모가 읽어주던 책에서 나온 그런 남자, 내가 평생 바라왔던 사랑이라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도 같은 마음일까요?"

"글쎄. 어떤 것 같습니까?"

 

애매한 대답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녀를 안달 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온종일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대답해주세요. 만약 당신도 같은 마음이라면...!"

"..."

"그럼...!"

"아가씨를 찾았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뒤에서 들이닥친 기사의 외침이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그녀는 원망에 가득 찬 눈동자로 기사를 쳐다보았다. 

 

"같은 마음인지 대답해주세요!"

"아가씨! 성에 난리가 났습니다! 다들 아가씨를 찾고...!"

"대답해요! 그냥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그녀는 기사에게 팔이 붙잡힌 채로 소리쳤다. 

 

"아가씨!"

"그렇게 말해줘도! 난!"

"가셔야 합니다!"

"난 오늘만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다구요!"

"그대의 아가씨를 너무 아프게 잡은 것 같군."

 

그녀가 기사에게 끌려가는 채로 소리치고 있는 것을 무언가 맘에 안 드는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그녀의 팔을 아프게 옥죄이고 있는 기사의 손을 떼어냈다. 어버버한 표정의 기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대답해요."

"마차를 대령해. 그대의 아가씨를 모셔가려면 마차를 데려오는 것이 순서일 것 같군."

"...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처음 보는 그의 태도에 입을 꾹 닫았다. 끝끝내 대답해주지 않겠지. 끝끝내 주지 않던 팔찌처럼. 

 

"흑흑."

 

괜히 눈물이 났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지도 못한 채, 소맷자락을 잡았다가 놓았다. 멀리서 마차가 달려왔다. 저 문을 열고 마차를 타면 그녀는 처음으로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기사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마차 계단을 한걸음 올랐다.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일. 내일 봅시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사라졌다. 그녀는 마차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고수머리가 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있었다. 

 

내일. 우리 아마 보지 못할걸요.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성안은 마치 어제 갔던 시장만큼이나 시끌벅적했다. 신랑이 될 사람인 세주르 아렌은 어젯밤 성에 도착했다고 전해 들었다. 오는 도중 길을 잃었다고.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유모는 여분의 드레스가 있어서 다행이라며, 새 드레스를 꺼내왔다. 기사들은 새벽까지 그녀의 방문 앞을 지켰고, 그녀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벽에 걸린 하얀 드레스를 쳐다보았다. 

 

"어머, 우리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셔요."

 

그녀는 표정을 잃은 채 시녀들이 입혀주는 대로 입고 치장해주는 대로 몸을 맡겼다. 

 

"신랑이 첫눈에 반하겠어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어제의 나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지.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기사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서 방을 나섰다. 연회장으로 가는 길은 촛불로 밝혀져 있었다.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세주르 아렌의 기사가 맞았을까. 그럼 결혼식에 참석했을까. 그럼 얼굴은 볼 수 있겠다. 그거라도. 난 그거라도. 

 

"천천히 걸어서 신관 앞으로 가시면 아렌 경께서 맞아주실 겁니다."

"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기사를 쳐다보았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입장하셔야 합니다."

 

전혀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녀는 등이 떠밀려 결혼식장으로 입장했다.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아주 천천히. 그래서 조금이라도 이 결혼이 미뤄졌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와중에, 어디에선가 그가 나를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 약혼녀가 걸음이 느린가 보군요."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제가 대신 가는 수 밖에 없겠군요, 신관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성스러운 제단의 끝에 있는 사람을, 아니 저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당신."

"그래, 내가 오늘 보자고 하지 않았소."

"당신이 어떻게..."

"어제는 그냥 결혼할 사이에 얼굴이나 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당신..."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릴 줄은 몰랐소."

 

주저앉은 그녀에게 익숙한 팔찌를 찬 손이 내밀어졌다. 

 

"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졌소. 어제."

"..."

"같은 마음이라는 거요. 처음부터."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그녀를 일으키고, 장내는 소란스러워졌지만 둘의 귓가에는 전혀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나를 속였어요."

"아니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건 당신이오."

"난 정말."

 

긴장이 풀리자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세주르는 그녀의 눈빛을 다 받아내면서 하하 매력적으로 웃었다. 

 

"자, 결혼하러 갑시다."

 

 

"결혼 선물이 있소."

"뭐예요?"

"새 신부는 까칠하군."

 

피로연에서 세주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그는 계속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고, 심통이 난 새 신부는 입을 삐죽였다. 그는 그런 모습을 보며 예복 주머니를 뒤졌다. 

 

"이거."

 

팔찌였다. 그가 두 개를 산 팔찌 중 하나. 

 

"난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오. 그래서 어제 당신이 나에게 이걸 매어줬지."

 

그는 팔을 흔들어보았다. 

 

"이제 드디어 당신에게 물을 수 있겠군."

"뭐를요?"

"나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마음을 갖고 있소?"

 

그녀는 팔을 내밀었다. 얇은 끈 하나가 묶였다. 어릴 적 유모가 읽어주던 동화 속의 멋진 남자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 여자. 그리고 둘만의 아름다운 결혼식.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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