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eis
류트
길고 고단한 전쟁이 끝나고 아나톨로 돌아온 뒤로도 두 사람은 한동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영주가 자리를 비운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보고받아야했고, 광산이며 새로 건설되는 항구 주변들, 돌봐야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리프탄은 리프탄대로, 맥은 맥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리프탄은 잠결에 맥의 온기를 찾아 큰 손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식어버린 빈자리에 리프탄은 번쩍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칼립스경, 이 쪽지를 보는 즉시 제가 준비해 놓은 옷을 갖춰 입고 성문 밖 호숫가로 오세요.]
*
호숫가 근처로 걸어가는 길. 얕은 언덕길에 커다란 오크나무가 보였다. 그 아래 긴 붉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곳으로 걸어가는 작은 흙길 양옆으로 색색의 꽃잎들이 뿌려져있었다. 초록빛 풀밭 사이사이로 앙증맞은 들꽃들이 박혀있었다. 마치 그가 지나는 길을 축복해주는 손길 같기도 했다. 너른 들판엔 리프탄과 맥 둘뿐이었다.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리프탄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때의 리프탄은 걸어가는 내내 절망 속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비싸고 아름다운 것들로 감싸여 있던 맥에게서는 혼인의 들뜸이나 설렘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 역시 맞지도 않은 멍청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회색빛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공포만이 가득했었다. 그녀의 그늘진 얼굴을 보면서 바들바들 떠는 마른 손등을 보면서 그는 너무도 비참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눈앞의 아내는 간단한 드레스에 자줏빛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다 죽어가던 잿빛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맑았다. 리프탄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서자 눈이 휘어지게 웃는다.
“아직 바깥공기가 찬데,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리프탄의 저음에 맥은 몸을 살짝 부풀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손으로는 리프탄의 굳은살이 박힌 두터운 손을 잡고 한손은 자신의 심장으로 가져갔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맥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나 맥시밀리언 칼립스는 리,리프탄 칼립스에게 게,겟슈를 바치겠어요!”
바치겠어요, 바치겠어요, 바치겠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 에코가 되어 멀리 날아갔다.
비장한 표정으로 당차게 외쳤던 맥의 얼굴이 곧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게 타올랐다.
“여성도, 겟슈를 사랑하는 상대에게 바,바,바칠 수 있어요. 그,그럼 기사는 부,부인의 부탁을 단호하게 무,물리칠 수 없는 것이라 해,했어요!”
리프탄이 무어라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 성벽같은 남자는 넋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른 아침에 봉변을 당한 남자의 표정이란 저런 것일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 나름대로 준비한 놀라운 이벤트였다. 몇 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끙끙거리며 머리칼을 쥐어뜯을 때마다 루스가 혀 차는 소리를 내곤 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지난날을 돌이켜본 결과, 그녀에게 조언이랍시고 해주던 것들은 모두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뭣보다 이번 일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고 싶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냥 꼬깃꼬깃한 편지들을 곱게 펼쳐 간직해두거나 외투 안쪽에 달아놓았던 가죽주머니 속 검대장식들을 보면서 맥은 새삼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그렇게 애지중지 했으면서 그 속내를 들킨 것에 그는 매우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굴었다.
돌이켜보면 받기만한 애정이었다. 달콤한 것을 맛보는 게 좋아서 취해있었다. 아나톨로 귀환하면 받은 것들을 하나하나 돌려줄 생각이었다. 둘 사이의 앙금을 그렇게라도 메우고 싶었다.
그래서 야심차게 준비했다. 기사인 그에게 유일한 겟슈를 바친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고백인가! 그리고 겟슈를 바치러 오는 길을 예쁘게 꾸몄다. 처음부터 뒤틀린 길이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과거가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그런데,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리프탄은 리프탄대로 아연한 상태였다. 겟슈를 바치겠다는 부인의 당돌함에 충격을 받은 건지 그녀의 입으로 ‘사랑하는 상대’라고 말한 대담한 고백에 놀란 것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아내를 노르누이로 떠나보내고 한동안 그는 제대로 된 사고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뒤틀렸고 어그러졌던 그 밤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자신이 예법을 배운 귀공자였다면 싸우지 않고 좀 더 부드러운 말로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좋아할 밀어를 속삭여 줄 수도 있었겠지. 하나 자신은 진창에서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천민이었다. 태생부터가 달랐다. 재산을 긁어모으고 권력을 틀어쥐어 껍데기를 감쌌어도 알맹이는 공작령에서 대장질을 하던 땀내나는 이방인이었다.
“리프탄...거절이든, 뭐든..마,말을 좀 해봐요.”
상념을 치우듯이 리프탄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귀가 살짝 붉어진게 보였다.
“거절이라니, 내가 너를 어떻게 거절한다는 거야.”
“그,그럼, 받아주실 건가요?”
“그래.”
자신의 손을 잡은 맥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잠시 허리를 숙여 그녀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맹세에 대한 답은 방으로 들어가 듣도록 해.”
*
규방에 들어온 리프탄은 하녀들이 들여온 나무대야에 맥의 하얀 두발을 집어넣었다.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물속에 발을 넣자 으으응-기분 좋은 신음소리를 냈다.
규방 안에서 찰랑이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렸다. 리프탄은 그녀의 발목을 잡아 자신의 무릎에 올려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았다. 말랑말랑한 그녀의 발을 보던 리프탄이 고개를 숙여 발등에 키스했다. 예상치못한 키스에 맥이 당황해 몸을 빼려했지만 리프탄은 놔주지 않았다. 발등 위로 그의 더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평생 당신에게 예속된 삶을 살겠어.”
“....”
“언제나 당신 곁에서-”
몇 번이고 부서지고 깨어진 마음들을 매번 주어다 붙였다. 엉성하게 갖다 붙인 조각들은 작은 것에도 금세 다시 벌어졌고, 결국 자신의 모든 걸 허물어 무너뜨리고 들어앉은 여자. 맥은 그의 심장 안으로 들어가 둥지를 틀었다.
“리프탄..”
맥이 두 팔을 벌리자 리프탄이 그녀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이마며, 뺨에 키스했다. 말캉하고 보드라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며 핥았다. 품안 가득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작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위안이었고 안식이었다.
너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작은 손으로 색색의 조약돌을 주워 모을 때부터. 네 몸의 배는 되는 짐승을 껴안고 외로움을 달랬을 때부터, 형편없는 나뭇가지로 마물의 몸을 내려칠 때부터. 나는 너에게...
두 사람은 그날의 상처들을 핥아주듯 밤새 서로를 어루만졌다. 숨을 나누었고 살을 나누었다. 서로의 손은 풀리지 않았다.
10년 후,
“리프탄?.....잠들었어요?”
“.....”
맥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남편의 얼굴을 더듬었다. 미간을 찡그리지 않은 그의 얼굴은 한결 편해보였다. 이제 리프탄은 제법 맥시의 곁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실바람이 기분 좋게 그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 위로 볕뉘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도도도 바쁘게 움직이는 발소리와 꺅꺅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저기 우리 아이들이 달려오고 있어요.”
굳게 다물렸던 입술선이 스윽 올라간다. 그의 뺨을 만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돌려 입술을 꾹 눌렀다. 둘만의 달콤한 시간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오늘도 무척 소란스럽고 즈,즐거운 저녁이 될 것 같아요.”
그는 평생을 그녀에게 예속되어, 그녀의 남편으로 살 것이다.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이곳 아나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