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o Knows
산기슭
알 수 없는 것이 인생
D-30
여름을 앞둔 칼립스 성은 분주해졌다. 날이 풀려 아나톨을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한몫했지만, 렘드라곤 기사단의 부단장 헤바론 니르타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처음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너 나 할 것 없이 놀라워했던 것도 잠시, 축하할 일이 생긴 탓에 성의 분위기도 금세 들뜨기 시작했다. 연회장 단장을 위해 새로 불려온 일꾼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가벨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전 니르타 경이 저나 리카이도 경보다 일찍 갈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습니다."
"거기서 나는 빼줬으면 좋겠군."
우슬린이 말하자 옆에서 함께 구경을 하던 유리시온이 물었다.
"리카이도 경은 니르타 경이 먼저 갈 거라고 예상하셨던 건가요?"
“아니, 나는 저놈이 이번 생에는 결혼 못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다들 너무한 거 아니야?"
헤바론이 투덜거렸다.
"너무한 건 네놈이겠지. 네가 처음에 아가씨께 저지른 무례를 생각해 보면 네 청혼을 받아들이신 게 놀랍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유리시온의 물음에 우슬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항구의 바람 때문에 아가씨의 치맛자락이 날리는 걸 보고 휘파람을 불다 들켰다더군.”
"아..."
유리시온이 탄식하자 헤바론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가씨가 성에 도착해서 단장님과 귀부인께 인사드릴 때 우리도 있었는데, 저 녀석이 환영한다고 말하니까 '아까 항구에서 휘파람 부신 게 환영의 의미였군요?'라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그때 그건 나도 모르게 그런 거였다니까. 그리고 항구에 있을 때는 평복 차림이었는데 그렇게 금방 알아볼 줄 내가 알았나?"
그의 말에 우슬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단 정복 안 입고 있으면 그렇게 시정잡배처럼 굴어도 된다는 뜻인가?"
"뭐 인마? 시정잡배?"
금방 으르렁거리는 둘을 말리던 가벨이 말했다.
"덕분에 그날 단장님한테 호되게 당했었죠?"
"귀부인 아니었으면 그날 연무장에서 못 나갔을걸?"
헤바론이 킬킬대며 말하자 우슬린이 코웃음을 쳤다.
"단장님이 너무 봐주신 거지. 그리고 그 일만 있었나? 그 후에 아무리 말을 걸어도 아가씨가 별 대꾸를 안 하시니 너무 냉랭해서 얼음인지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다가 들켜서는 3주 동안 술도 금지당했다."
"술은 왜요?"
"근무시간에 농땡이 치고 술 마시면서 투덜거리다 들켰거든."
"아..."
"얼빠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얼음인지 사람인지 구별을 못 하실 정도라면, 이길 수 있을 만큼만 술을 드시는 게 좋겠어요.' 하시더니 바로 가서 귀부인께 보고하는 바람에 한동안 헤바론 한정으로 금주령이 내려졌지."
"그때 정말 힘들었지... 연회 때도 나만 술을 안 주더라..."
헤바론이 그답지 않게 아련한 표정을 짓자 가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 결혼이 성사된 게 신기하다는 거 아닙니까. 로드리고는 저한테 두 분이 진짜 결혼하시는 게 맞냐고 다섯 번은 물어봤다고요."
"진짜 다들 너무하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결혼하시게 된 겁니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가로우가 불쑥 물었다. 헤바론이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야 뭐.. 아무래도 내 남자다운 매력에 빠지게 된 거 아니겠어?"
"헛소리하는 거 보니 기운이 넘치나 보군."
옆에서 타박하는 우슬린의 말을 흘려들으며 헤바론이 그때쯤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
1년 전
'내가 다시 말을 걸면 헤바론 니르타가 아니라 헤바론 리카이도다.'
3주 금주라니, 전장에서 큰 상처를 입고도 안 하던 짓을! 그런 말 좀 들었다고 속 좁게 쪼르르 가서 고해바치는 그녀도 그렇지만, 귀부인도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 우리가 함께 해 온 세월이 있는데! 속으로 맹렬히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헤바론이 멀찍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오던 길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던 그의 눈에 그녀의 양팔에 가득 안긴 책들이 스쳤다.
'알게 뭐냐. 하인이라도 시키겠지.'
모른척하고 돌아서려던 헤바론은 아까 지나가듯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원 단장 때문에 성내의 하인들이 대부분 그쪽에 가 있을 거라고 했던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한번 낸 그는 결국 몸을 돌려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들고 있던 책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이런 건 나중에 하인들을 시키십쇼. 뭐 하러 이렇게 무거운 걸 직접 들고 다닙니까?"
갑자기 들려온 불퉁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다가 조금은 멋쩍은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바로 봐야 할 일이 있어서...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의외군. 내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녀를 흘끔 쳐다본 헤바론이 걸음을 옮겼다. 항구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 딱딱할 정도로 곧은 자세와 가면 같은 무표정은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휘파람을 불다 눈이 마주쳤을 때도 다른 여자들처럼 부끄러워하거나 발칵 화를 내기는커녕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던걸 생각하니 괜히 뱃속이 불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함께 걷는 복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여전히 말없이 걷는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괜히 부루퉁한 생각이 들었다. 말 한마디를 안 하네. 나랑은 이야기도 하기 싫다 이건가? 아주 냉랭하시구먼! 그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문을 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귀부인의 집무실 한 쪽에 있는 그녀의 책상에 책을 내려놓고 나니 괜히 뭐라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제가 항상 한심한 짓만 하고 다니는 건 아닙니다."
"...그야 물론 그러시겠죠?"
뜬금없는 말에 그를 쳐다본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답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불쑥 불평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3주는 너무 긴 거 아닙니까?”
“기간은 제가 정한 것도 아닌걸요.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
“성에 납품된 술을 종종 말없이 가져다 드신다면서요. 마님께서 손님용으로 특별히 주문해둔 술인데 말이죠.”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헤바론은 찔리는 마음을 감추며 괜히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저 같은 놈에게 그렇게 좋은 술은 아까우시겠지요, 그렇지만...”
평소와 같이 변죽을 울리려던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제 이야기의 논점을 흐리지 말아 주세요, 니르타 경. 마님께서 경에게 성내에서는 금주하라고 하신 이유는 업무시간에 몰래 말도 안 하고 드셨기 때문이잖아요.”
이게 안 먹히네. 예전에 귀부인은 넘어가 줬는데. 딱 자르는듯한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잃은 헤바론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게다가 매번 두통씩이라니... 그렇게 드시면 건강에도 안 좋아요."
살짝 찌푸린 그녀의 미간을 바라보던 헤바론이 히죽 웃었다.
“지금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네.”
이때다 싶어 헤바론이 짓궂은 말을 꺼내려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니르타 경의 행동이 렘드라곤 기사단의 품위를 떨어뜨릴까 봐 걱정되네요.”
차분한 목소리로 헤바론의 말문을 막은 그녀가 이내 원래의 단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제가 기사단의 일원도 아니고, 기사단의 품위야 기사분들께서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요.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헤바론은 문을 닫고 나오며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빈틈이 없구먼. 바늘 하나 안 들어가겠어. 아 이런 말 하면 또 냉랭한 표정을 지으려나? 괜한 소리를 하다가 잔소리만 실컷 들었는데도 왠지 조금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 말을 걸면 눈빛이 조금 뾰족해지는 그녀를 볼 때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
우슬린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헤바론을 쳐다봤다.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던 가로우와 유리시온마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왠지.. 어떻게 결혼하시게 된 건지 점점 알 수가 없어지는데요.."
"진짜 3주는 너무 길다고까지 말했던 겁니까..?"
가벨이 떨떠름하게 묻자 낄낄거리고 웃던 헤바론이 말했다.
"분위기가 좀 바뀐 건 그다음이긴 했지.”
∴
그날은 전날 내린 비로 땅이 엉망이 되어 아침부터 일이 많았다. 연무장을 돌아보고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문을 나서는 그녀를 발견한 헤바론이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는 다르게 외투를 걸쳐 입은 걸 보니 외출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 고지식한 아가씨도 외출 정도는 하겠지. 그쪽을 빤히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던 그의 귓가에 마부에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십니까?"
"네, 마을에 좀 다녀와야 할 일이 있어서요."
마을? 날이 따뜻해지면서 영지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는 바람에, 기사들이 자주 가는 술집에서도 외지인들이 종종 문제를 일으켜 주인장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아가씨가 그런 질 나쁜 놈들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겠지만...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다리는 이미 마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가 호위하죠.”
그를 보고 가볍게 목례한 그녀가 물었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요즘 영지에 새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어떤 사람들이 들어왔는지 모두 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의 설명을 듣고도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나올 때까지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이건 꼭... 숙제 검사 맡는 어린애가 된 기분인데... 그의 머릿속에서 그 감정이 이름을 찾으려는 찰나, 그녀가 답했다.
"그렇다면... 부탁드릴게요."
그가 예상했던 대로 마차 안은 조용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후 그가 몇 마디 주절주절 떠든 말에 그렇군요, 내지는 그래요,라는 대답만 돌아오는 통에 겸연쩍어진 헤바론이 입을 다물자 더 이상 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땐 역시 가벨 그 녀석이 있어야...’
이전에 복도에서 가벨과 한참 대화를 나누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잠시 가벨의 단점을 열심히 찾아보던 그는 자신이 조금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왜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하셨습니까?"
헤바론은 질문을 꺼낸 순간 후회했다. 우슬린이 항상 하던 - ‘넌 하고 싶은 말을 못 참는 그 입 때문에 언젠가 일을 그르칠 거다’ - 잔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가세가 기울었거든요. 가져갈 지참금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약혼자 쪽에서 파혼 통보를 하더군요.”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그녀가 그의 무례를 탓하는 대신 질문에 답했다. 그 사실에 내심 당황한 헤바론이 할 말을 찾는 사이, 그녀가 평소와 다름없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누구랑 결혼해도 지참금은 필요하니 일을 시작했는데... 열심히 일해서 지참금을 다 모으고 나니 결혼 적령기를 지나버렸더라고요."
그가 자기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멍청한 노... 사람이군요. 손안의 보석도 못 알아보다니."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보고서야 당황한 헤바론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이건..."
변명해보려던 헤바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례한 언사라고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쩝니까?"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선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치 못했던 맑은 웃음소리에 그는 목덜미가 홧홧 해지는 기분이 들어 괜히 딴청을 피웠다.
∴
우슬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놈이 꾸준히 무례를 저질렀고 아가씨가 꾸준히 관대하셨다는 건 잘 알겠다."
"아니 근데 진짜 그때부터 분위기가 꽤 말랑해졌다니까 그러네? 그 후로 말 걸어도 대답도 잘 해주고, 자주 웃어줬다고.”
“니르타 경이 너무 귀찮게 구니까 청혼을 승낙하신 거 아닙니까?”
가벨이 놀리듯 던진 말에 헤바론이 구시렁거리며 반박하는 사이, 루스와 맥시밀리언이 다가오는 걸 발견한 유리시온이 반갑게 귀부인을 불렀다. 맥시밀리언이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 중이었나 봐요.”
“니르타 경이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고 계셨습니다!”
옆에서 루스가 알은체를 했다.
“귀부인 일 도와주러 오신 분 말이죠? 저는 처음에 그분 봤을 때 리카이도 경하고 느낌이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외모보다는 그 깐깐한 분위기가 말이죠.”
"그, 그 정도는..."
거침없는 루스의 평가에 맥시밀리언이 소심하게 반박하려는 찰나, 옆에서 가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다소 그런 부분이 있죠.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것도 그렇고..."
"잔소리가 심한 부분도 그렇고요."
“아... 그, 그건 그러네요...”
우슬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맥시밀리언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 부분에 공감을 하시는 겁니까, 귀부인?"
우슬린의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길을 맥시밀리언이 애써 모른척하는 사이, 유리시온이 헤바론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분은 니르타 경의 어떤 점에 반하신 겁니까?”
“뭐 말 안 해도 뻔한 거 아니겠어? 나의 듬직한 면에 반했던 거겠지. 외출할 때마다 호위도 해주고 궂은 일들도 도와줬으니 말이야.”
“아무래도 하도 쫓아다니니 귀찮아서 승낙하신 거라니까요.”
가벨의 놀림에 발끈하며 답하려던 헤바론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매무새를 한번 후다닥 살펴본 그가 평소와는 달리 재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던 가벨이 말했다.
“니르타 경마저 저럴 줄은 몰랐는데...”
“정말 저 녀석의 어떤 면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셨는지 모르겠군.”
“니르타 경 강하고 멋지시잖아요! 칼립스 경만큼은 아니지만요.”
우슬린과 유리시온을 번갈아 보던 맥시밀리언이 웃으며 말했다.
"귀여워서라던데요."
“...예?”
가벨의 얼빠진 되물음을 들으며 다들 저 멀리서 헤바론이 약혼녀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받아 들고는 싱글거리며 쫓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귀엽다고요?”
“역시 사랑은 위대한 감정이라더니...”
“아가씨도 상당히.. 독특하시군.”
혼란스러워하는 마법사와 기사들 사이에서 맥시밀리언만이 조금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
헤바론은 자신의 옆에서 걸어가는 약혼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사실 동료들에게 둘 사이의 일을 모두 다 이야기해 준 건 아니었다. 그런 걸 미주알고주알 말하기엔 조금 멋쩍은 기분도 들었고, 또...
‘굳이 이 사람이 귀여워 보였던 일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지.’
그날은 영지 근처에서 오랜만에 발견된 마물의 토벌을 나갔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그 토벌은 왠지 좀 재수가 없었는지, 평소 시원찮게 굴던 신참을 구하려다 운 나쁘게도 마물의 발톱에 긁히고 말았다. 그 일로 한참을 우슬린과 가로우에게 잔소리를 들은 것도 모자라 기강이 해이해졌다며 사납게 노려보는 단장을 피하느라 오랜만에 몸을 풀 기회였음에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토벌 내내 새끼를 품고 있는 맹수 마냥 사납게 굴던 단장은 다행히도 마중 나와있는 귀부인을 보자 기분이 좋아진듯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아직도 뜨거우시군! 하며 킬킬거리다 단장의 매서운 눈길을 받은 후에야 귀부인의 옆에 함께 나와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왜 여기까지 나와있지? 게다가 얼굴빛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추운가? 그야 기사들의 괴물 같은 체력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날은 아직 덥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따뜻했다. 헤바론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녀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유독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을 살피는 듯한 그녀가 이상해 흘끔흘끔 쳐다보는데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그걸 그새 소문을 낸 모양이군요. 별일 아닙니다. 그저 조금 긁힌 것뿐이라고요.”
투덜거리던 헤바론이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잠시 눈을 끔벅이던 그가 곧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했습니까?”
“...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와 멋쩍어진 헤바론이 괜스레 더욱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얼간이처럼 굴어 기사단의 품위를 해칠까 봐서요?”
그의 말을 들은 그녀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그거야말로 정말 얼간이 같은 말이네요. 당연히 니르타 경을 걱정했던 거잖아요!”
평소와 다르게 언성을 높인 그녀가 제풀에 놀라 멈칫하더니 입술을 깨물고는 홱 돌아걸어갔다.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놀란 헤바론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서 저만치 걸어가던 그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방금 한 말은 잊어줘요.”
“무슨 말 말입니까? 제가 걱정됐다는 말 말하는 겁니까?”
“...아뇨. 얼간이 같다는 말이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어버린 헤바론이 웃음을 멈추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이미 웃음소리를 들은 그녀의 얼굴이 점차 빨개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원래 그런 말 안 쓰는데...”
빨개진 얼굴을 하얀 두 손에 묻고 웅얼거리는 걸 보며 헤바론은 문득 그 손을 치워버리고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그녀에게 일을 마친 후 마을을 구경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으면,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그녀도 평소와는 달리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했고, 그날 저녁 둘은 함께 마을을 구경한 후 그의 단골 식당에 가 식사를 했다. 후에 그녀는 그날을 떠올리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날씨가 너무 좋아서였던 거 같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갔던 잡화점에서 헤바론이 예전에 잠시 만났던 여자를 마주치는 바람에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다가, 옛날 일인데 뭐 어때?라고 애써 위안했던 건 그 혼자만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D-21
귀부인은 성실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기사들의 결혼식에 꽤 많은 신경을 쓰곤 했다. 적당한 드레스를 구하려던 자신의 약혼녀에게 본인의 재단사를 불러주고는, 이건 자기가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부득불 우기던 귀부인을 떠올리던 헤바론이 피식 웃었다.
'무, 물론 다른 건 리프탄이 준비해 줄 거예요. 이, 이건 내가 해주고 싶어요.'
‘아뇨, 마님. 이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그저 적당한 수준으로 하면 되는걸요.’
‘그, 그렇지만.. 제 동생 생각도 나고 해서 채, 챙겨주고 싶은데...’
‘하지만 마님... 나이는 제가 더 많아요.’
‘...그, 그럼 언니 생각나는 걸로 해요.’
고집스럽게 온갖 이유를 대며 자신의 약혼녀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귀부인은, 어느 날 조심스럽게 자신을 따로 불러 말했다.
‘요즘 결혼하는 신부들은 하, 한 쌍으로 된.. 꽃을 본뜬 장신구를 한대요.’
‘그렇습니까?’
‘그, 그리고 그걸 남편 될 사람이 서, 선물해야 의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가장 예쁜 걸 골라와야겠군요.’
기대에 차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귀부인에게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야기를 들은 김에 곧바로 마을에서 제일 큰 공방을 찾아가니 주인은 요즘 꽤 흔한 일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인기 있는 모양새를 이것저것 추천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그녀를 연상케 하는 하얀 꽃이 장식되어 있는 장신구를 고른 게 벌써 2주 전의 일이었다.
헤바론은 방금 받아온 장신구가 담긴 상자를 열었다. 안쪽에 짙은 색의 천을 덧댄 상자에는 곱게 세공된 하얀 꽃 세 송이와 그 주변을 작은 진주와 크리스털이 감싼 형태의 머리장식 한 쌍이 놓여있었다. 투박한 손으로 장신구를 살짝 쓸어보던 그는 상자를 닫아 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평생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었는데... 결혼 준비가 진행될 때마다 괜히 기분이 요동 치곤했다. 이걸 보면 기뻐하려나?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머리 장식을 받고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며 성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눈에 한 가족이 보였다.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를 그의 아내인 듯한 여자와 아이들이 배웅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 특별할 것 없는 풍경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말을 몰아 성으로 향했다. 품에 넣은 상자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지만 왠지 갑자기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D-15
곱슬거리는 주황색 머리의 소년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자다 깬 탓에 약간 기분이 별로였지만, 투정 부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른들끼리 나누던 대화가 끝났는지, 거칠고 큰 손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항상 그랬듯이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표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배웅한 후 자신을 꼭 껴안는 어머니의 옆얼굴이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을 뿐.
그 후로도 종종, 어머니는 창밖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몇 살쯤 더 먹고 머리가 굵어졌을 때엔 나는 나중에 결혼하면 절대 저렇게 아내를 걱정시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것도 한참 옛날의 일이지만.
자신을 기다리거나 걱정해 줄 사람이 없어진 후에도 그 표정은 가끔 볼 수 있었다. 길을 떠날 때, 배웅 나온 동료들의 연인이나 배우자들은 그때의 어머니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더 어릴 땐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내심 부러워서, 약해빠진 놈들이나 저런 표정을 짓게 하는 거라며 괜히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걱정이 가득한 그들의 표정이 꼭 반가움이나 환희에 찬 웃음으로 바뀌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걱정이 걷힌 자리에 웃음 대신 절망이 차오르는 걸 마주할 땐, 문득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가 떠오르곤 했다. 역시 저런 표정을 짓게 할 바에야...
아, 그렇군. 나와 결혼하면 그녀도 항상 그런 표정을 짓게 되겠지.
기어이 한동안 꾸지 않던 어릴 적 꿈을 꾼 후에야 헤바론은 최근 자신이 왜 계속 조금 우울한 기분이었는지 깨달았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깨서 멍한 머리에 방금 전에 꾼 꿈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은 항상 죽음과 함께 걷고 있었다. 이름을 날리던 놈들도 잠깐 방심하면 목이 떨어지는 게 보통이었고, 실력이 있어도 운이 나쁘면 크게 다치기도 했다. 곧고 단정하면서도 가끔은 외로워 보이던 그녀의 등이 떠올랐다. 외롭지 않도록 함께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그녀를 슬프게 만들면 어쩌지.
그럼 포기할까? 내면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냥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혼자 지내면 된다. 잠깐 온기를 나눌 상대를 만나고, 깊어지기 전에 정리하고, 울 것 같은 상대의 얼굴을 모른척하고... 그녀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 따위는 금세 잊고 행복해질 테지. 비겁한 생각이 머리를 차곡차곡 채우는데, 자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가만히 들어주던 그녀가 떠올랐다. 타인의 온기가 함께 하는 그 어떤 순간보다 평온하고 평범했던 순간들이.
그는 창밖으로 어스름하게 동이 터 오는 걸 보면서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결혼식을 이주 앞둔 날이었다.
D-9
"곧 결혼할 사람 얼굴이 왜 그렇습니까?"
“음? 내가 뭐?”
왠지 멍하니 앉아 있던 헤바론은 가벨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우슬린이 타박했다.
“아까부터 손이 전혀 안 움직이고 있다.”
“아, 잠을 좀 못 자서 그런가...”
“결혼식 때문에요?”
결혼식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한 헤바론이 얼버무렸다.
“뭐... 그렇지.”
“준비는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이제 입장만 하면 될 텐데요.”
“그렇지 뭐...”
묘하게 맥빠진 그의 대답에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따 귀부인 집무실로 뭘 좀 옮겨야 하는데, 니르타 경이 가실 겁니까?”
순간적으로 크게 움찔하는 헤바론을 본 기사들이 좀 더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뭡니까? 사랑싸움이라도 한 거랍니까? - 글쎄, 난 들은 바가 없는데.
“어, 아, 아니... 난 볼 일이 있어서. 그럼 난 좀 가봐야겠군.”
헤바론은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끝까지 따라붙는 가벨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모른 척 한 그는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메리지 블루인가..."
후다닥 멀어지는 헤바론을 보며 가벨이 걱정된다는 듯 중얼거리자 루스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예? 누가요, 니르타 경이요?”
“하긴, 저놈은 쓸데없는 데서 생각이 많으니까.”
“아니, 우울이요? 니르타 경이요?”
우슬린이 알만하다는 듯이 말하자 서류를 뒤적이던 엘리엇이 점잖게 말했다.
“니르타 경이 가끔 섬세하긴 하잖습니까.”
“평생치 섬세함을 지금 다 쓰는 모양이지.”
“경들 제 섬세함도 신경 좀 써주시란 말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젓는 루스를 보던 유리시온이 물었다.
"그런데 저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면 행복하기만 할거 같은데요. 그게 왜 우울할까요?"
동시에 유리시온을 바라본 기사들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을 어린아이 보듯이 보는 시선들에 당황한 유리시온이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가로우를 쳐다봤다가, 그의 친우마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웃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다들 아직도 자기만 어린애 취급한다며 작게 투덜거렸다.
D-7
아예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그저 기쁘기만 했는데.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 당연히 강해져야 할 때인데도 마음은 더 무르게 변하는 것 같았다. 온갖 걱정이 한데 엉켜 마음 한구석을 점점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었다.
며칠째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보고를 위해 리프탄의 집무실로 향한 헤바론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웬일로 귀부인이 집무실에 와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기다리면 되겠지 싶어 문 앞에 서있는데 안에서 언성이 높아지다가 급기야는 리, 리프탄은 정말 바보예요!라고 외치는 귀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부부 싸움을 하시던 중이었군. 귀부인이 세계탑에서 돌아온 후에도 부부는 종종 다투곤 했다.
마법사로서의 일을 하겠다는 귀부인과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하는 단장의 실랑이가 조금 오래 가다 보면 저렇게 언성이 높아질 때가 있었다. 귀부인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지면서도 매번 반대하며 화를 내는 단장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가 미처 숨을 곳을 찾기도 전에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남편의 부하에게 이런 장면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다시 얼굴이 발개지는 귀부인을 보며 헤바론이 잠시 눈을 굴리다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단장님과 이야기 중이셨나 보군요.”
“네.. 리, 리프탄을 보러 왔나 봐요. 저, 전... 이제 용건이 끝났어요.”
“예, 귀부인, 그.. 아까 보니까 주방에서 로바르가 귀부인 드린다고 뭘 하고 있는 거 같던데, 알고 계십니까?”
“그, 그래요? 가봐야겠네요.”
맥시밀리언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미소가 돌아오는 것을 보며 헤바론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집무실 안에서 리프탄이 소리쳤다.
“거기서 뭘 노닥거리고 있는 거야, 니르타! 당장 들어오지 못하나?”
리프탄의 성난 목소리에 입술을 꾹 깨문 맥시밀리언이 헤바론에게 애써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서, 성격 급한 칼립스 경에게 가보세요. 전 제 할 일을 하러 가야겠어요.”
멀어지는 맥시밀리언의 뒷모습을 잠시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던 그가 집무실로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리프탄은 꽤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거 적당히 하십쇼, 단장. 귀부인은 그저 단장을 걱정하는 것뿐이잖습니까.”
“네놈 눈엔 내가 아내의 걱정이나 받아야 하는 얼빠진 놈으로 보이나?”
저 성질머리하고는. 자신의 단장은 평소에는 신기할 정도로 냉철하게 굴면서 자신의 아내만 연관되면 도가 지나치게 사납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헤바론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귀부인은 그냥 단장을 좋아하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적당히 받아들이십쇼."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단장을 걱정하는 건 정말 쓸모없는 짓이긴 했다. 드래곤의 브레스도 가르는 사람을 그렇게 평범한 사람 대하듯 걱정하는 건 세상 천지에 귀부인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던가.
"어쨌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
단장을 설득하기 위해 꺼낸 말이긴 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 그 스스로도 깨달았다. 걱정하는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역시 자신을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생긴다는 사실을 꽤 기껍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나도 참 이기적인 놈이군. 자조적인 생각을 하던 그는 앞에서 전해져 오는 살기 어린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내 아내의 생각을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곧 결혼식이라고 봐줬더니 꽤나 심심한 모양이지?"
물론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리프탄의 사나운 기세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 후로 며칠 동안 하던 고민을 잊을 만큼의 고생을 해야 했다.
∴
헤바론이 깨달음을 얻은 대신 몸으로 고생을 하고 있던 그때, 우슬린 리카이도는 드물게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리카이도 경?”
작게 움찔한 우슬린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원래 남의 연애에는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결혼식이 점점 다가올수록 말이 없어지고 멍해지던 헤바론을 떠올리며 우슬린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저 멀리 약혼녀의 치맛자락만 보여도 엄마 소 따라다니는 송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던 그가 어느 날부터 그녀를 슬슬 피하는 걸 본 이상, 그저 그러려니 할 수가 없어졌던 것이다.
‘평소라면 나도 이러진 않겠지만, 결혼식이 코앞인데..’
이러다가 아가씨에게까지 차여 평생 결혼도 못 하게 되면 어쩌겠는가? 그의 생각에 헤바론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다만 문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헤바론에게 속으로 잠시 험한 말을 퍼부은 우슬린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가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서류에서 눈을 뗀 그녀가 말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일은 해결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 네. 귀부인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침묵이 이어지자 그녀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우슬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고민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을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이 심란해 하는 거라면, 이미 알고 있어요.”
우슬린이 민망한 듯 몇 번 헛기침을 하자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말했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다만... 그 친구가 조금 생각이 많은 편이라서요.”
생긴 거랑 다르게 말이지. 일견 호쾌한 듯이 보이지만, 가끔 섬세한 면을 보이곤 했던 헤바론을 떠올렸다. 걱정하는 내용은 뻔했다. 그렇게 고민이 되면 차라리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라도 하면 좀 편할 텐데, 평소에 쓸데없는 소리는 잘도 내뱉으면서 막상 중요한 얘기는 속으로만 끙끙 앓기만 하고... 자신의 동료에게 박한 평가를 내리면서 우슬린은 여전히 별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그녀의 얼굴을 흘끔 쳐다봤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화가 나 있거나 상심에 잠긴 것 같지는 않아서,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변변찮은 변명도 못해준 것 같은데 정말 이걸로 된 건가 싶었지만, 어차피 해결은 당사자끼리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며, 여하튼 간에 자신의 동료는 손이 많이 가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
우슬린과의 짧은 대화 후 계속해서 일을 하던 그녀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벌써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받은 후, 궁금한 마음에 주변인들에게 넌지시 아나톨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나톨의 영주 부부야 이미 꽤나 유명인이었던 터라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없었는데, 그중에는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렘드라곤 기사단의 부단장이 상당히 호전적인 성격이라더라, 어떤 기사는 외모는 예쁘장한데 입이 굉장히 거칠다더라, 대화가 꽤 능숙한 기사가 있는데 그렇게 매력적이라더라...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아나톨에 근사한 외모를 가진 기사들이 많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부러워 죽겠다고도 했었던 것도 같다.
'그때 호전적인 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가벼운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그녀가 아나토리움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화창하지만 바람이 꽤 강한 날이었다. 이리저리 날리는 치맛자락을 고정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었다.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휘파람을 불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딜 가나 저런 사람은 있다고 생각하며 못마땅함을 숨기고 몸을 돌린 것도 잠시, 오기 전에 전해 들었던 렘드라곤 기사단의 부단장의 외모가 떠올랐다. 그 기억이 떠올랐을 때는 내심 내가 착각한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에서 다시 만난 그가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 후로도 이상하게도 계속 마주칠 일이 생겼고, 마주치기만 하면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은 일들 투성이었다.
언제였더라. 갑자기 왠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진 날이 있었다. 이유를 찾다가 불현듯 요 며칠 그 남자를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든 잠깐의 상실감은 며칠 전 이번 토벌은 좀 걸릴 거라며 투덜거리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바람에 아지랑이처럼 금방 사라져버렸지만.
그리고 그가 돌아오던 날은 이상하게도 종일 마음이 수런거렸다. 미리 도착한 전령이 마님에게 곧 기사단이 당도할 거라는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부상자가 두 명 있어서 돌아오면 마님께서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 누가 다쳤는데요?”
“니르타 경하고 그의 종자가 조금.. 괜찮으십니까?”
마님에게 사정을 설명하던 기사가 놀라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마님은 자신이 부상 소식에 놀랐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날 자신은 상처 같은 건 입지 않을 것 같던 그 남자도 다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바람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마중 나가는 마님을 굳이 따라나서지 않아도 되는데도 따라나섰던 건 그래서였겠지.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그와 얽히면 자꾸 원래의 자신과는 다르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 어색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무례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말과 행동에 위로받고, 평소의 나와는 다르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 점점 즐겁게 느껴졌던 것은.
글쎄,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과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 거기다 그가 결혼을 앞두고 그렇게 싱숭생숭해 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심란해 하던 그의 표정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떠올라 그녀가 피식 웃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이 석양에 물들어 주황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D-3
그녀가 헤바론을 찾은 곳은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가 놓여 있는 방이었다. 자신을 피하던 며칠간 그가 종종 그 방에 들어가 나란히 놓인 그와 자신의 예복을 한참 바라보고 간다는 사실은 하인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방에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가만히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그의 옆에 앉자,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헤바론이 입을 열었다.
“남편 될 사람이 신부에게 머리 장식을 선물하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더군요.”
건네받은 상자를 열어본 그녀가 미소 지었다.
“예쁘네요.”
꽃잎 장식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끝을 보며 헤바론은 그동안 준비해왔던 말들을 떠올렸다. 나만 믿으십시오,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은 다 잊게 해주겠습니다, 당신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겠습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말들로 야심 차게 준비한 말들은 이상하게도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고, 사실은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나? 움찔한 헤바론이 그녀를 바라보자, 상자를 닫은 그녀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우린 괜찮을 거예요.”
우습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며칠 동안 마음 한구석에 실타래처럼 엉겨 붙어 크기를 키워가던 모든 걱정들이 사라졌다.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 결국은 포기하고 멋쩍은 듯 웃은 헤바론이 농담처럼 물었다.
“내가 조금 못나게 굴어도 계속 귀여워해 줄겁니까?”
“그럼요.”
“당신을 화나게 만들어도요?”
“화는 좀 내겠지만 귀여워는 해줄게요.”
음, 여전히 가차없군. 왠지 만족스러워진 헤바론이 입을 열었다.
“그럼 입 맞춰도 됩니까?”
흠, 하고 조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3일 후면 부부가 될 테니까, 그 정도는 괜찮겠죠.”
씩 웃은 헤바론이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의 숨결이 섞였다.
D-Day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성과 달리 신랑이 있는 방은 꽤 조용했다. 이미 한차례 시끄럽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던 기사들이 빠져나간 방에서 예복을 차려입고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우슬린이 툭 내뱉었다.
"그래도 이제는 네놈이 좀 땅에 발붙이고 사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군."
헤바론은 괜스레 코 끝이 찡해지는 걸 느끼며 우슬린을 바라봤다.
"앞으로 평생 부인한테 잔소리 들을 네놈을 생각하면 밥을 안 먹어도 든든하고."
"아, 분위기 깨기는! ...방금 좀 감동받았단 말이다."
너스레를 떠는 헤바론의 말에 피식 웃은 우슬린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방을 나섰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하인이 이제 가셔야 한다며 부르러 왔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결혼을 진짜 하긴 하는군. 언젠가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역시 인생은 모를 일이군.’
예복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답답하지는 않았다. 연회장으로 향하는 도중 기사들이 던지는 짓궂은 농담과 축하의 말에 웃으며 답하던 그는, 연회장 입구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분명히 자신은 지금 굉장히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예복을 입은 그녀는 빛을 빚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눈부셨으니까. 헤바론은 제멋대로 씰룩이는 입꼬리를 손으로 감추며 그녀의 앞에 섰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아가씨.”
손을 내밀자 섬세한 무늬의 베일 너머로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당신도 굉장히 멋있어요.”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자 헤바론이 단상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긴장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 차라리 마물을 잡고 말지, 두 번은 못하겠군.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옆에서 걷는 그녀를 쳐다보자 탐스럽게 땋아 올린 머리를 수놓은 꽃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무겁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묵직하게 느껴졌던 상자가 떠올랐다. 소중한 것이 생긴 만큼 늘어난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그냥 씩 웃어버렸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혹시라도 이 행복이 짧은 순간만 머물다가 내 손을 떠나더라도, 슬픔에 눈물을 흘려도, 계속 살아갈 수 있겠지. 내가 그랬듯이, 죽은 자들의 남은 가족들이 그랬듯이... 창밖으로 푸른 나무 잎사귀가 어른거렸다.
D+2000
"엄마 이게 뭐예요?"
쌍둥이가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요즘 보물 찾기에 재미를 들이더니 옷을 보관해둔 방에서 무언가를 찾은 모양이었다. 낯이 익은 상자를 열어본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 결혼식 때 네 아빠가 선물해 준 거란다.”
“엄마 아빠랑 결혼식 했어? 우린 왜 몰랐어?”
딸들의 엉뚱한 질문에 웃음이 터진 그녀는 쌍둥이를 꼭 껴안아주고는 머리 장식을 꺼내들었다.
"자, 돌아앉아봐. 엄마가 공주님처럼 머리 예쁘게 해줄게."
아빠를 닮아 곱슬거리는 주황색 머리를 곱게 땋아올려 각자 하나씩 머리 장식을 해주자 일부러 맞춘 듯이 어울렸다.
꺅꺅거리며 거울 앞을 떠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녀가 미소 지었다. 벌써 몇 년 전이더라? 햇빛이 유독 밝게 내리쬐어서 꼭 빛을 밟고 가는 듯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하얀 꽃들과 밝게 켜둔 등불들이 늘어서 있는 그 길을 그와 함께 걸어갔었다. 그날의 연회장은 행복을 그대로 형상화시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저 답지 않게 긴장해버리는 바람에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연회장의 불빛 아래서 따뜻한 빛으로 반짝이던 그의 황갈색 눈동자와 자신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던 그의 손만은 기억에 깊게 남아있었다. 그날을 떠올리자 괜히 그가 그리워졌다.
그녀가 몇 년 전의 추억에 잠겨있는 사이, 누군가 오는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문가로 달려나갔다.
“아빠 왔다!”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헤바론에게 대롱대롱 매달리는 쌍둥이들을 보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읏차- 하며 양쪽으로 쌍둥이를 안아 올린 그가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키득거리며 웃은 쌍둥이들이 종알거렸다.
“아빠! 우리 공주님 머리했어!”
“어디 보자~ 아이고 우리 아가씨들 예쁘네~”
그가 쌍둥이들에게 뽀뽀를 하자 아이들이 꺅꺅거렸다. 아 아빠 수염 따가워! - 따갑다고 하는 입이 요 입인가~? 헤바론은 아이들이 따갑다고 꿍얼거리면 일부러 더 수염을 부비곤 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가까이 갔다가 부서지면 어쩌냐며 백일 가까이 누워있는 아이들 주변을 맴돌기만 했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변화였다. 그때 쩔쩔매며 당황하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땋는 방법을 열두 가지는 알고 있는 데다, 가끔은 동네 초보 아빠들이 와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는 인재가 되었다. 처음으로 아이들 목욕을 시켜놓고 드래곤 잡은 것보다 더 진이 빠진다며 엄살 부리던 그를 떠올리며 그녀가 작게 웃었다.
∴
한참을 쌍둥이들과 놀아준 헤바론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쌍둥이들을 재워놓고 방문을 닫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머리에서 빼낸 장식을 상자에 다시 넣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고 귓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 헤바론이 입을 열었다.
“내일은 당신도 쉬는 날이니 그 김에 마을에 나가볼까요? 라크시온이 그러는데 왕도에서 꽤 유명한 극단이 왔다고 하던데.”
“애들이 연극하는 동안 얌전히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애들은 맡겨두고 나가자는 말이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헤바론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뭐, 당신하고 단둘이 시간 보낸지도 좀 오래되기도 했고...”
그녀가 그를 마주 안으며 미소 지었다.
“옆집 부인께 아이들을 잠시 맡아달라고 이야기해보죠.”
“오랜만에 당신 옷도 좀 보고 옵시다.”
작게 웃은 그녀가 말했다.
“잡화점도 들러야 해요.”
끌어안은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져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 아가씨는 이제 거기서 일 안 하는 거 같던데.”
“...알고 있었습니까?”
“모를 수가 없겠던데요. 당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어찌나 강렬한지.”
“그때 아무 말 안 해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야 그땐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요.”
헤바론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후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다시 작게 웃은 그녀가 그의 옷깃을 잡자 그가 순순히 몸을 낮췄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부부의 대화와 함께 평온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1
맥시밀리언은 옆에서 자신의 일을 돕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나톨로 귀환한 후, 마법사로서의 일까지 늘어나는 바람에 매일 일에 쫓겨 쩔쩔매던 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리프탄이 도와줄 사람을 하나 뽑지 않으면 모든 일을 다 못하도록 방에 가둬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반 정도는 그의 기세에 등 떠밀려 보좌 역할을 해줄 사람을 찾았고, 그렇게 함께 일하게 되었던 것이 벌써 거의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조금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를 않아서, 초반에는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에게나 그런 표정으로 대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게다가 그녀는 자신과는 달리 차분하고 단호한 면이 있어 이제는 꽤 도움을 받고 있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마님?"
아, 너무 오래 쳐다봤나 봐. 뜨끔한 속마음과는 달리 조금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은 맥시밀리언이 말했다.
"구, 궁금한 게 있어서요."
무언가 작성하던 손을 멈춘 그녀가 맥시밀리언을 바라봤다.
"니르타 경의 어, 어디가 좋아서 결혼을 결심했어요?"
맥시밀리언의 질문에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었을까? 맥시밀리언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처, 처음에 엄청 사이 안 좋았잖아요. 그게 조금 궁금해서요. 나는 저, 정략결혼이었으니까... 가끔 그런 게 궁금하거든요. 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결정하나 하고..."
아, 하고 작게 말한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뭐부터 말씀드려야 하나 하고 고민했을 뿐이에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녀가 말했다.
"여러 가지가 있긴 한데.. 역시 제일 큰 이유는... 그 사람이 귀엽게 느껴져서였던 거 같아요."
귀여워? 맥시밀리언은 거구의 기사를 떠올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맥시밀리언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그녀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
니르타 경이 귀엽다니... 역시 다시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좀 재미있는 편이긴 하지만 귀엽다니? 술이 들어가면 더 유쾌해지는 헤바론을 떠올리며 맥시밀리언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괴롭히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거야?"
“리프탄...”
점점 부풀어가던 머리카락에서 그녀의 손을 조심히 떼어낸 후, 그녀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피던 그가 물었다.
“아직도 피곤한건가? 역시 일을 좀 더 줄이는 편이...”
“아, 아니예요.”
아나톨로 돌아온 후, 한번 과로로 쓰러질 뻔하자 그렇지 않아도 과보호가 심한 그녀의 남편은 예전처럼 돌아가 거의 그녀를 유리 인형 다루다시피 하려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해 금세 우울해졌겠지만, 이제 그녀는 저 딱딱한 표정 뒤에 정말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기사지만 가끔은 소년 같은 그녀의 남편. 사랑스럽기까지 한... 문득 맥시밀리언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리프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 맥시밀리언을 의자에서 반짝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무리하지 말라고. 기사들 결혼식까지 당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 그건 내가 조, 좋아서 하는 거예요.”
사실 맥시밀리언은 기사들의 결혼식을 챙겨주는 게 꽤 즐거웠다. 그녀의 안에서 이미 기사단은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자신의 정수리로 리프탄의 한숨이 쏟아지는 걸 느끼며 맥시밀리언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냥.. 내가 리프탄을 마,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어서요."
순간적으로 리프탄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맥시밀리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직도 자신에게는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면서, 자기가 애정표현을 받을 때면 이렇게 굳어버리곤 했다. 그것이 조금 애달프고도 귀여워 그녀는 그의 가슴께에 살짝 볼을 부볐다. 잠시 후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둘러대는 말이라도 듣기는 좋군.”
“두, 둘러대는 말 아니에요!”
발끈한 그녀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차분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일렁이는 그의 눈빛을 보며 맥시밀리언이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면 그런 행동 못할 텐데.”
“무, 무슨 생각 하는데요?”
“당신을 당장 침대로 끌고 가서 이대로 삼일 동안은 방 밖으로 안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
맥시밀리언은 그의 노골적인 말에 입을 떡 벌렸다.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가 대꾸했다.
“그, 하, 하면 되잖아요...”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벌떡 일어나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그 말 후회해도 소용없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의 입술에 입이 막힌 맥시밀리언은 속으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칼립스 부인이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2
D-3 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엉겨 붙었던 숨결이 떨어지고, 그녀가 헤바론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자세가 좀 바뀐 거 같지 않나요?”
카우치에 그녀를 눕힌 장본인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씩 웃었다.
“그렇습니까? 나는 잘 모르겠는데.”
능청스럽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입 맞춰도 되냐고 물어봤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랬었죠.”
가볍게 대답한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디에 맞추겠다고는 말 안 한 거 같습니다만.”
그녀의 얼굴에 미약하게 당황한 표정이 서리는 걸 보며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에 입 맞춘 헤바론이 씩 웃었다.
“몇 번 맞추겠다고도 말 안 한 거 같고.”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탓인지, 동그랗게 뜬 눈만 깜박이는 그녀는 약간 억울해 보였다. 이런 억지에 약하시군. 자신의 약혼녀가 어떤 종류의 말싸움에 약한지 깨달은 헤바론이 웃음을 삼키며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맨살에 숨이 닿자 작게 움찔거리는 걸 느끼며 그녀의 귓가부터 목덜미까지 자잘하게 입을 맞췄다. 어느 정도 만족스러워진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발견한 건 의외로 상기된 그녀의 표정이었다.
‘아, 이거 좀 위험한데.’
뺨도 평소보다 발그레하고, 약간 기분 좋은 듯한...
‘여기서 그만두지 않으면 나도 위험하겠군.’
정숙한 귀족 여성의 표본에 가까운 그녀는 분명히 이 상황만으로도 꽤나 기겁한 상태일 것이다. 혼인 전에 뺨 맞을 수는 없지. 그가 아쉬움을 숨기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그, 느낌이 좀 이상하네요.”
“어떻습니까?”
“간질거리기도 하고.. 뭔가 조금...”
조금.. 뭐? 눈을 빠르게 깜빡인 그녀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 좋아요.”
부끄러운지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졌다. 물론 그와 반대로 헤바론의 의욕은 크게 상승했다.
“그럼 더 해도 됩니까?”
“...얼마나 더요?”
“...그건 해보고 정할까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두 사람의 인영이 다시 한번 겹쳐졌다. 사실 쌍둥이가 그날 찾아온 선물이라는 건 그 두 사람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