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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쿠아헬 리온|맑을 담

 그날 그의 유배형이 결정되었다. 여자는 머리에 돌이라도 맞은 마냥 정신이 멍해졌다. 쿠아헬의 유배라니 정말 말도 안 되었다. 그가 무슨 잘못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알게 무언가 여자는 당장 그를 찾으러 방문을 거세게 열었다. 

 

“아, 한참을 찾았네.”

 

 그때 발을 신발에 욱여넣고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진초록의 옷을 입고 사모를 쓰고 있는 상선이 다급하게 그녀를 부른 것이다. 왕의 지밀 내시가 무슨 일인가 싶어 여자는 의문스러운 눈을 떴다.

 

“상선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전하께서 널 급히 찾으신다. 리온 나으리의 일이니 모른척 할 생각은 하지 말게. 전하께서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신다.”

 

 여자는 왕이 모든 걸 안다는 사실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럼 나와 쿠아헬은 모두 죽을게 뻔한데 사형이 아닌 유배라니? 너무나 가벼운 벌이었다. 여자는 왕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이도 나도 그리고 이 아이도 죽일 순 없어.’

 

 여자는 상선을 따라 은밀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왕에게로 향하는 길에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설마 왕이 모든 걸 알고 있었을 줄이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라리 그와 함께 유배를 보내달라고 자신도 궁에서 내쫓아달라고 말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녀는 명확한 명분 없이 궁을 떠날 수 없었다. 불안감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걷자 어느새 상선은 외진 서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가 그곳으로 조심히 들어가자 붉은 곤룡포를 입은 왕이 촛불 하나를 키고선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를 저질렀다.”

 

 왕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고 어깨가 작게 떨려왔다. 멀리서만 흘끗하게 보던 왕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에 여자는 쩔쩔 매었다. 당장 그의 유배를 취소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유배가 아니면 사형일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를 너무 만나고 싶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설마 뱃속의 아이를 궁에서 키우겠다고 하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나으리를 만나게 해주세요.”

“짐의 물음의 먼저 답해라. 아이를 이곳에서 키울 것이냐?”

“제발 나으리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현실적으로 생각해라! 난 쿠아헬 그자가 내 오랜 친우라 겨우 유배에서 멈춘 것이다. 그 꼴을 하고 점점 배가 불러오면 도대체 어떤 핑계를 댈 것인가! 넌 분명 임신 사실을 들키고 내가 감춘 진실은 전부 밝혀질 것이다. 그럼 그는 유배지에서 죽고 너 또한 그 아이와 죽게 되겠지.”

 그는 그녀의 아랫배를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왕의 호통에 동공에 초점이 흐려졌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냥 이런 엉망진창인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전부다 그를 만나고 아이를 가진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자책감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지금부터 잘 들어라. 내가 지금 너에게 거래를 요구할 것이다.”

 

 왕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부터 그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무얼까 싶어 무례하다는 걸 알지만 왕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상황으론 네가 나의 빈이 되는 방법밖에 없다.”

“예..? 그게 무슨…”

“왕의 후궁이 되라는 말이다. 왕실에 후계자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겠지? 중전도, 몇 해 전에 들어온 후궁도 전부 딸을 낳거나, 유산하였다. 네가 만약 건강한 아들을 낳는다면 너에게도 좋은 기회이지 않으냐. 하지만 넌 아이를 낳으면 곧장 궁을 떠나야 한다. 물론 네 아이는 궁에 놓고 가야 한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선택의 변화는 있으면 안 될 것이다.”

“예?”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제 말에 깜짝 놀랐다. 여자는 아이 대신 쿠아헬을 선택한 것이다. 여자는 제 말을 정정하려고 할 때 왕은 이미 등을 돌려 서고를 급하게 나가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손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자신의 그 멍청한 선택으로 아이를 한 순간에 잃었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 바로 왕을 제 아비로 부르며 살아가겠지.

 

 그녀는 자책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여자의 얼굴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엎드려 작게 울부짖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

2년 전

 여자의 감청색 치마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 진한 푸른색은 꼭 그녀가 궁녀임을 증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쿠아헬 리온은 씁쓸하게 밀려오는 감정에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하지만 여자는 햇살같이 웃으며 그를 환하게 바라보았다. 여자는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덜컥하고 흔들렸다. 그 여자는 그를 망치러 온 것만 같았다. 칙칙한 옥색 저고리도 잔머리가 이리저리 튀어나온 새앙머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댕기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빛났다. 화려한 머리꽂이를 하지 않아도 고급 비단 옷을 입지 않아도 여자는 빛났다.

 

“나으리! 제가 무얼 찾았는지 아십니까?”

 

 여자는 웃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그러자 이내 작은 주먹을 피더니 그에게로 작은 꽃 하나를 내밀었다.

 

“이렇게 추운데도 벌써 꽃이 나는 걸 보면 이제 봄이 오나 봐요.”

“어딜 다녀온 겁니까. 한참을 오지 않아 막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들판에 야생화가 있길래.”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어색하게 바라보는 여자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주곤 길을 향했다. 그는 한 달에 두, 세 번. 그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물론 특별한 것 없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멍하니 바깥 풍경을 보거나 서책을 읽거나 함께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오늘은 시집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정말요? 전 나으리께서 시를 읽어주는 게 제일 좋아요.”

 그는 매달 여자에게 읽어줄 책을 골라왔다. 고전소설과 각종 시집들. 오늘은 그가 가장 아끼는 서책을 들고 왔다. 여자는 이상하게 유명한 문학보단 그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자는 웃으며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얼마나 길을 걸었을까. 쿠아헬은 옆에서 조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작은 방에 도착했다. 여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었고 그는 초를 켜 시를 읊기 시작했다.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짙어가는데,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지,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해지네.”

***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해지네.”

 

 여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품엔 쿠아헬을 닮은 얼굴을 한 사내아이가 곤히 자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여덟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아이를 품어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아이는 제 아비가 왕인 줄 알고 크겠지. 

 

 여자는 쿠아헬이 자주 읽어주던 시집을 뒤적거렸다. 이렇게 한 번씩 그가 너무 그리울 때면 그가 아끼던 시를 읽었다. 읽고 읽다 입으로도 뱉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를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아파지는 건 그녀였다. 그렇게 그녀는  상사병으로 그녀의 몸까지 병이 번져 여자는 점점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궁에서 나오게 되었다. 여자는 제주로 도착해 병으로 잠시 앓아누웠지만 점점 몸은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온 지 이틀, 그에게로 향했다. 그의 집은 죄인의 집이라 높고 험한 곳에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안내를 해준다 했지만 모두 거절하곤 혼자 산을 올랐다. 여자는 산을 오를 때 나뭇가지에 긁히거나 차가운 바람이 몰려와 당장이라도 하산하고 싶은 충동이 앞섰다. 하지만 여자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 향했다.

 

 그때 여자가 밟은 돌이 미끄러웠는지 순식간에 몸이 휘청하며 뒤로 넘어갔다. 여자는 넘어지지 않으려 저항하지도 안은 채 눈을 꼭 감았다. 이제 산에서 굴러떨어져 죽을지도 몰라. 모든 걸 포기했을 때, 누군가가 여자의 몸을 거세게 잡았다. 그런 손길에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떠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취를 박아놓은 듯한 초록빛 눈,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 쿠아헬이다. 드디어 쿠아헬을 만난 것이다. 여자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렸다. 정말 보고 싶었다고 내 삶은 너무나 지옥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곳에…”

 쿠아헬은 우는 그녀를 안아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계속해 쓰다듬었다. 그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수도 없이 여자의 꿈을 꾸었겠지. 여자는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 잠에서 깨면 쿠아헬과 아이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도 원한다. 그와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봄꽃이 피면 궁궐엔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겠지요.”

 

 여자는 반듯하게 개어있는 배냇저고리를 쓰다듬었다. 그 촉감은 그녀를 더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여덟 달.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배에서 느껴지던 태동도, 갓 태어나 품에 안기는 모습도, 입을 오물거리며 자는 그 모습도 이젠 그녀 곁에 없다. 아이는 제 어미와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고 왕을 아비라 부르며 자라가겠지.

 

 쿠아헬은 그런 그녀의 공허하고 슬픈. 마음을 눈치챘는지 여자를 보듬어주었다. 그의 안정적인 심장박동이 귓가에 둥둥 울려 퍼졌다. 그의 숨소리와 심장박동을 들으면 제 자신의 모든 것이 진정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워해도 소용없다. 난 아이보다 쿠아헬 리온을 더 원했으니까. 난 다시 선택의 길 앞에 서면 어떤 선택을 할까. 쿠아헬과 이름도 모르는 내 아가. 아니, 난 다시 선택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런 선택을 하겠지. 두 번의 선택 따윈 없다. 

 척박한 땅인 제주에도 꽃은 핀다. 봄이 되면 유채꽃이 들판에 화사하게 피겠지. 그렇게 쿠아헬과 함께 이곳에서 평온하게 늙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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