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보라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많은 꽃잎
맥시밀리언 칼립스|비버솦펭
1432년(세종 14년) 12월, 그 날은 겨울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집안의 하인들은 하늘의 뜻을 어찌 알겠냐며 변덕스러운 천기(天氣)에 혀를 내두르며 분주히 겨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가 정신이 없을 그 때, 다급히 말을 몰고 달려온 왕실의 서찰이 평안도 여연(閭延)군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나리!”
“그렇게 되었네. 미안하네, 권이소 대감.”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평소에는 온갖 예의범절을 지키던 아버지가 큰 소리를 냈다. 군수 나으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새로오는 군수에게 귀띔을 해두었으니, 괜찮을걸세. 아마 관아에 당도하는 날에 권이소 대감내에 찾아올테니.”
“하오나 나리… 아무리 그래도 여진족 출신이라니 이건 당치도 않습니다!”
“자네가 여진족을 몹시도 싫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나라님께서 정하신건데 내가 어찌하겠나, 잘 지내보는 수 밖에.”
아버지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나리는 잘 지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권이소 가(家)의 기와집을 떠났다. 화가 단단히 나신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나는 방으로 조심히 돌아왔다.
권이소(權貽所) 가는 내가 7살이 되던 해에 여연군에 정착했다. 국경과 가까워 위험하지만 여러가지 특혜를 준다는 나라의 말에 안 그래도 추웠던 곳에서 더 추운 지방으로 올라오게 되었지만, 덕분에 아버지는 여진족의 습격이 있어도 군에 끌려가지 않는 대감마님이 되었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겨울에도 여진족이 이 마을을 계속 괴롭혔으나 점점 평화가 깃들었고 권이소 가는 여연군에서 제 일 풍족한 집안으로 열여섯 해를 보내왔다.
그리고 군수 나리를 구워 삶아 더 세도를 펼치려던 아버지의 계획은 왕께서 새로운 군수를 보내셨다는 소식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것도 여진족 출신의 무관을. 아무리 아버지여도 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새로운 군수가 도착하는 날까지 아버지의 얼굴은 분노로 평소보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군수 나리 납시오!”
한결 같은 목소리가 외치는 익숙한 말. 대문이 열리고 보인 얼굴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더 까무잡잡한 얼굴, 새까만 머리칼과 새까만 눈. 아버지와 동생 뒤에서 함께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자 내 눈에 들어온 모습이었다. 어마어마한 군이 올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새 군수는 고작 넷이서 찾아왔다. 모두 푸른 갑주를 입고 있었고 군수 나리처럼 6,7척은 훨씬 웃도는 덩치였다. 깊은 바다 같은 푸른 갑주와 은으로 된 용이 이 거대한 기와집을 순식간에 압도했다.
“권이소 가의 이시언(杝示彦) 입니다. 여연군의 새로운 군수 나리께서 이 누추한 곳에 행차해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어명을 받고 여연군의 군수로 책봉된 곽임수(郭任帥) 가의 이한(鴯翰)이다. 이전 군수께서 남기신 서신을 보고 이리로 찾아왔네만.”
“예. 어서 사랑채로 드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자, 자사자왈(子思子曰)… 천며, 명지위서, 성(天命之謂性)… 하아…”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혀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온갖 귀한 서책들로 말하기 연습을 시켰으나,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더듬지 않고 <소학(小學)>의 첫 시작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운 고함소리와 회초리가 날아왔지만 동생인 오은태(晤銀兌)가 미모는 물론 총명함까지 지니고 있음을 깨닫자, 매일 밤 나를 괴롭히던 암송 시간은 끝이 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와 보살핌도 함께 끝났다. 이후로 나는 홀로 외로운 나날들을 방 안에 틀어박혀 서책을 읽고 산을 바라보고, 때가 되면 재워주는 유모의 손길과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가끔은 오늘처럼 달이 밝은 밤에 나와, 혹시라도 나아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서책을 찬찬히 읽는 연습을 해 보았으나… 그 끝은 매번 처참했다.
‘이 쓸모없는 계집!’
머리속에서 울려 퍼지는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나를 짓눌러왔다.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에 잠겨 죽지 않으려면 다시 입을 여는 데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솔성지, 지위도(率性之謂道)… 수, 수도지ㅇ, 위교(修道之謂敎)…”
“…”
“…딸꾹”
서책에서 잠시 고개를 들었더니,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도 모르게, 낮에 봤던 나리가 저 먼 치에 서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허둥지둥 서책을 덮고 도망가려는 나에게 그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잠시, 잠시만 멈춰주시오!”
분명 머리에서는 도망가라고 아우성이었지만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에 내 다리는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내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목소리가 들려 여까지 오게 되었소.”
“…소, 송구하옵니, 니다…”
“아까 마당에서 그대를 보았는데, 권이소 가의 여식인 것인가?”
“…예, 그, 그러하옵...니다...”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나는 곽임수 가의 이한이라 하오.”
“궈, 권이소 가의… 맥서, 설화(陌蔎華)…”
“맥설화…”
그는 조용히 내 이름을 중얼거렸고 내 얼굴에서는 계속 열이 올랐다. 안 그래도 붉은 머리칼과 얼굴색이 똑같으면 흉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고개가 자꾸만 숙여졌다.
“그대를 놀라게 한 것은 다시 한번 사과하지. 해를 가하거나 엿들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소.”
“…예… 시, 심려를 끼쳐 송구하, 하옵니다…”
나의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그 뿐이었다. 한참 뒤, 큼큼 하는 헛기침과 함께 그가 겨우 말을 꺼냈다.
“읽던 것이 <소학>이 맞는가?”
“예. 마, 맞습니다. 나, 나리께서도 아, 아시옵니까…?”
“…아무리 오랑캐에 전쟁터에서만 구르던 사람이라도 기본은 해야한다더군. 덕분에 이방에게 들들 볶이고 있지. 글을 읽는 것도 쉽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소.”
“이, 이전에는… 글을 이, 읽지… 모, 못하셨습니까?”
“…맥설화 낭자, 북쪽에 있는 치들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한 족속이오.”
그의 목소리가 사뭇 달라졌다. 마치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과거의 이야기가 그에게 안 좋은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그의 낯빛을 살폈지만 어느새 그는 다시 처음 봤던 태산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 이제 그만 들어가시오.”
“예. 나리도…”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왔다. 달빛을 가린 긴 그림자가 잠시 그대로 있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쉬이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
“아니… 이거를 어떻게 저 혼자서 다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호방이나 다른 육방 중 한명이라도 붙여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여유도, 사람도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 주상께서도 너무하시지…”
“어차피 자네의 업무 아닌가.”
“저는 일을 더 하기 싫어서 군수 자리도 거절한 것인데 이거는 원…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방자리도 거절했을 텐데…”
“…지금이라도 주상께…”
“아니요! 그만 두십시오. 장군은 진짜로 하실 것 같아서 농도 못 꺼내겠습니다.”
겨울의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군수와 한 남자가 열심히 대화를 하며 걸어가는 것이 담장 너머로 보였다. 이한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군수는 어제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이었고 두루마리들을 들고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가던 남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에서 땀이 났고 쥐고 있는 엽전에도 땀이 배는 것만 같았다. 어제 밤, 달빛 아래 함께 앉았던 자리에서 엽전 하나를 발견한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그 사람의 것이라 생각해서 돌려주려 관아에 찾아왔지만, 파란 갑주의 병사들을 보자마자 모든 자신감이 사라졌다. 엽전을 만지작거리며 관아 주변을 걷던 중, 기억에 남아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역시 여연군 대부호는 다르더군요. 내 생에 궁궐을 제하고 그렇게 으리으리한 곳은 처음 봤습니다.”
“집을 볼 여유가 있었나보지?”
“…언행을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시면 입에 가시가 돋히십니까?”
“…?”
“됐습니다. 권이소가네 규수가 아리땁던데, 그거는 보셨습니까?”
“…봤지.”
“그거는 용케 보셨군요. 혹여라도 권이소 대감이 혼사 이야기를 꺼낼까 했는데 그 치의 표정을 보니 그럴 일은 없겠더군요. 은색의 머리칼이 독특하던데.”
“은색 머리칼?”
“그러면 다른 색의 머리칼이 또 있었습니까?”
“내가 본 여인은 붉은 머리였는데.”
“예? 어제 권이소 대감 옆에 있던 규수는 은색이었는데… 도대체 누구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자네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본 여인은 붉은 머리칼에 구름 같은 눈을 가진 여인뿐이었네.”
“…말을 맙시다. 장군은 들어가십시오. 저는 장군께서 떠넘기신 일이나 처리하러 가야겠습니다.”
붉은 머리칼에 구름 같은 눈이라니, 설마 나를 말하는 걸까? 그럴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숨겨져 있듯 서 있었고, 아버지 옆에 있던 것은 절세미인이라 불리는 동생 오은태 밖에 없었을텐데.
한참을 서있다 들어간다는 말에 정신이 번뜩 들어 발걸음이 급해졌다. 일, 이 다경(茶頃) 전만해도 범 같아 보이던 병사들이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빠르게 신분패를 보여주고 문을 넘어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이한이라고 하셨던 군수님은 계시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아, 아야!”
“아니, 앞을 좀 보고 다니십시오!”
“소, 송구하옵니다…”
“낭자는 뉘신데 관아에 계신겁니까?”
“아, 아… 그… 이한 구, 군수 나리를 ㅂ, 뵈러…”
“…곽임수 장군을?”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자 아까 이한과 대화를 나누던 회색 머리칼의 사내가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보잘 것 없는 계집이 고작 엽전 하나를 들고 감히 군수 나리를 뵈러 찾아왔다고 해서? 그를 봐야겠다는 당찬 마음은 어느새 가루처럼 사라지고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손만은 떨면 안 돼, 맥설화. 손까지 떨면 아니된다고.
“장군이 따로 말해두신 건 없었는데… 무슨 일이신지요?”
“어, 어제… 이것을 두, 두고 가셔ㅅ, 서…”
“…! 이것을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저, 저희 집... 그, 그러니까 권이소 가, 가에 오셨을 때 두, 두고가신 거, 것 같습니다.”
“권이소 가의 규수셨군요. 장군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주고는 바닥에 떨어진 두루마리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도와 함께 줍다가 묶음이 풀려버린 두루마리의 글자들을 보고 말았다.
“…여연구, 군의 세금… 혀, 현황…?”
“…!!! 낭자, 혹시 글을 읽을 줄 아십니까?”
“네? 네… 미, 미흡하지만…”
“혹시 읽으시거나 공부하셨던 서책은 있으십니까? 글을 쓸 줄도 아십니까?”
멋대로 내용을 본 것에 책임이라도 물을까 두려워 몸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지만, 돌아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들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면 낭자께서는 이 고을의 사람들이나 물건들 등 여러가지 것들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조, 종들이 하, 하는 것들을 본 저, 정도입니다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낭자, 저는 아직 여연에 대해서 아는 것은 터무니없이 적은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습니다. 누구든지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고 이 고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낭자께서 도와주신다면 제 일이 빠르게 끝나는 것은 물론, 이 마을의 발전에도 필히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예…? 허, 허나…”
“이 많은 일거리들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 많은 것들을 혼자 하게 된다면 저는 일주일 내로 앓아누울지도 모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보며 그는 입을 삐쭉 내밀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평생 쌀이나 축낸다는 소리를 들어온 사람에게 그의 말은 도무지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알았다는 대답에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자신을 설승윤(說承㣧)가의 우신(遇信)이라고 소개한 그는 새로운 군수와 함께 궁에서 파견된 이방이었다. 우신은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가 이것저것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내는 세금을 기록하는 법, 쌀을 계산하는 법 등등…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을 무렵, 문이 덜컥 열리고 검은 눈이 이글거리며 들어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장군께서 호방을 붙여주지 않으시니, 제가 찾을 수 밖에요.”
“그래서, 양반 가의 규수를 호방으로 부려먹으시겠다?”
“부려먹다니요! 농이 지나치십니다.”
“됐어. 맥낭자, 나오십시오.”
“맥설화 낭자, 제가 따로 연통을 드리겠습니다.”
우신은 눈을 찡긋거리며 문을 닫았다. 거의 끌려나오듯이 나오자, 이한은 나를 연못 앞의 정자로 데려갔다. 머리 속을 가득 채우던 우신의 목소리가 서서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나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관아에는 와볼 일이 없어서 안에 이런 연못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처음 보는 광경에 두리번 두리번 거리자, 머뭇거리던 이한이 말을 꺼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 어제 이, 이것을 두고 가셔서….”
“아… 고맙습니다.”
엽전이 드디어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가 소중한 듯 엽전을 만지작 거리는 모습을 보니 궁금해졌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렇게 커다랗고 강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왜 슬픈 기색이 보이는걸까.
“시, 실례가 되지 아, 않는다면… 어떤 여, 엽전인지 여쭈어 보, 보아도…”
“조선에 와서 처음 받은 물건입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본 이름 모를 이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엽전이라며 저에게 주었습니다. 돌아가고자 하는 희망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기에, 이런 것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더군요. 다음날의 전투에서 그는 제 눈앞에서 화살에 목이 뚫려 죽었습니다.”
“…!!”
“어차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목숨, 전장에서 죽는 것이 그나마 덜 비참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엽전을 받고 나서부터,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되더군요.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 고단하셨을 것 가, 같습니다.”
“양반집 규수께서 들으실 만한 이야기는 아닌데.”
“괘, 괜찮습니다. 전쟁과 과, 관련된 서책드, 들도 꽤... 읽었어서…”
어젯밤과는 다르게 부드러워진 말투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무서운 말들과는 다르게 담담한 모습을 보이는 나리를 보니, 외롭고 고단한 시간들을 보냈겠구나 싶었다. 마치 나처럼.
“글 읽는 것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어제도 <소학>을 읽고 계셨고.”
“어, 어제의 일은 이, 잊어주세요.”
“…? 어째서…?”
“…저에게 부, 부끄러운 이, 일입니다…”
“어떤 점이? <소학>이라서?”
그는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것일까? 나와 이만큼 대화를 한 사람이라면 알고도 남을텐데… 그는 말을 더듬는 나를 보면서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저, 저는… 혀가… 구, 굳어서…”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까?”
“……”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연유를 모르겠군.”
그 뒤로 그가 몇 마디 더 중얼거렸는데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사실, 들릴 정신이 없었다.
말 하나조차 똑바로 하지 못한다며 아버지께 매를 맞았던 세월이 스무 해 하고도 세 해가 되어간다.
이 나이가 되도록 시집은커녕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연유였다. 쓸모없다고, 혀가 굳은 병신이라고 온갖 욕지거리를 들어왔는데,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니… 여진족에는 말을 더듬는 사람이 많았던 걸까?
“아, 그리고 우신이 낭자를 괴롭힌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아, 아니어요… 설승, 아니 우, 우신 나, 나리께서는 저에게 마, 많은 것을 가르쳐주셔, 셨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반집 규수에게 무턱대고 일을 시키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괘, 괜찮습니다.”
그는 잠시 무심한듯 하늘을 흘깃 바라보다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이 추우니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예? 아, 아닙니다. 혼자서도 추, 충분합니다.”
생각도 못한 말에 나는 두 손을 휘저었지만 그는 말없이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을 앞서간 후, 뒤를 돌더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
새로운 군수가 온 지도 여러 달이 지났다. 나는 관아에 갔던 그 날을 계기로 우신을 도와 여연군의 겨울나기를 도왔다. 그는 단순한 셈과 기록을 시작으로 필사, 책장 정리, 심지어는 관아의 문서들을 새로이 정리하여 요약하는 일까지 시켰다. 살면서 제일 어려운 일들이 쏟아졌고 바쁜 시간들이 이어졌지만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생각에 몸이 힘든 지도 몰랐다.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일까, 겹겹이 껴입은 옷들을 벗고 어느덧 꽃향기가 창을 통해 불어올 무렵 기어코 일이 생겼다.
“어…? 낭자!!! 낭자 코에서 피가!!”
머리가 찡- 하더니 무언가 주르륵 흘렀다. 종이에 붉은 점들이 툭툭 찍혔다. 우신은 고개를 뒤로 젖히지 말라고 외치더니 옆방으로 달려갔다 왔다. 그가 건네 준 것은 초록색의 가루였다.
“이걸 코 안에 잘 넣으시면 됩니다.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요. 어떻게 하는지 아, 알아요.”
가루들을 살살 뭉쳐 코 안에 잘 집어넣었더니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가루가 안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숨을 쉬고 있자 우신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물었다.
“약초 다루는 것에 익숙하십니까?”
“어렸을 ㄸ, 때에도 몸이 약해 이런 이, 일이 자주 이, 있었습니다.”
“혹시 다른 약초들도 다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 제채(薺菜)나 호... 호이초(虎耳草) 가, 같은 것들로 상처 치, 치료 정도는 할 줄 압니다.”
“낭자께서 약초에 대해서도 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에 약초에 대한 서책이라도 드려야겠군요.”
오늘만큼은 피까지 흘린 사람에게 일을 더 시킬 수는 없다며, 나는 말린 국화와 함께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집에 돌아가서 약한 불에 달여 먹으라는 말은 덤으로. 유모도 코에 약초 넣어주는 정도로만 끝났는데 이런 걱정의 말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울렸다.
참으로 나에게 과분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계집이라서 관직을 할 일도 없는데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던 말만 아버지께 들었는데, 누구나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우신을 만나 알지 못했던 것을 많이 알아가고 있다. 나라면 충분히 집현전도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역시 과하지만. 주어진 일도 잘 해가고 있었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쓸모 없다 생각했던 내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관아를 오가는 동안 이한이 나를 꾸준히 배웅해주었다. 비록 여연에 온 지 달포도 채 안 된 시기에 벌어진 전쟁 중에는 그를 볼 수 없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마을의 복구를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해가 지고 내가 가야 할 시간이 되면 우신의 집무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대문을 잘 들어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같이 끼니를 때우는 시간이 늘었고 때때로 연못을 돌거나 정자에 앉아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 함께 있는 날이 많아지게 되자 눈에 익은 병사들도 생겨 관아에 출입할 때 신분패를 확인하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그는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우신은 그가 거친 사람이라고 했으나 내가 본 그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 대화할 때는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고 가끔 퉁명스럽게 말을 하더라도 악의가 담겨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말을 더듬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낭자!”
“ㅇ, 예?”
“소매에 피가 묻어있소… 괜찮은건가?”
“아, 비혈(鼻血) 때, 때문이옵니다. 지금은 괘, 괜찮습니다.”
“우신 놈 때문이오?”
“아, 아닙니다!! 스승님은 아,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제가 조금 무, 무리를 하여…”
어느새 이한이 다가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굳어지는 그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가끔 가다가 그는 나를 지나치게 신경 쓰고는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했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주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오, 오늘은 일찍 도, 돌아가라 하여 먼저 나왔습니다.”
“잠시 다과라도 함께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무리겠군.”
“아… 아닙니다! 괘, 괜찮습니다.”
시무룩해 보이던 그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자주 가던 가까운 관아의 정자에 갈 줄 알았는데 오늘 그의 발걸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를 천천히 따라가자 도착한 곳은 마을 입구에 있는 언덕이었다. 생명이 깨어나는 시기답게 꽃들이 곳곳에 피어 있었고 그 향을 맡아보고 싶어, 비혈을 막기 위해 코에 넣어뒀던 약초 뭉치를 꺼내 버렸다. 다행히 피는 금새 멎었고 꽃내음이 지끈지끈 아파오던 머리까지 치유해주었다. 나는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너른 들판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마치 꽃보라 같이 꽃잎들이 흩날렸다.
“너무 고, 고와요… 마치 비단 가, 같습니다.”
“…그런가.”
우리는 언덕의 가장 위까지 찬찬히 걸어 올라갔다. 경사가 그리 가파르지도 않았건만, 이한은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내가 조심히 올라오고 있는지 살펴보며 가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도 그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푸르른 언덕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야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우리는 함께 마을의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이한이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찾더니 약과 하나를 내주었다. 나는 약과를 받아 반으로 똑 떼어 하나는 내 입에, 나머지 하나는 그에게 건넸다. 그는 머뭇거리다 약과를 받더니 한입에 삼켜버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대는 이 언덕에서 이 풍경을 보고 컸겠소.”
“저도 열, 열여섯 해 정도입니다.”
“이 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예. 본디 강계(江界)에서 나고 자, 자랐습니다. 일곱이 되, 되던 해에 여연으로 와, 왔습니다.”
“그렇군. 아, 코에 있던 것을 떼어냈소?”
“예. 꼬, 꽃내음이 맡고 싶어 버, 버렸습니다. 이제는 괘, 괜찮습니다.”
“다행이오. 우신이 해준 것이오?”
“예. 제가 야, 약초를 다룰 줄 아는 거, 것이 신기하다며 다, 다음에는 서책도 주신다 하셨습니다.”
“약초? 약초까지 다룰 줄 안단 말인가? 우신 대신 그대를 이방으로 임명해야겠는데.”
“과, 과찬이시옵니다. 제 몸에만 사, 사용해본 저, 정도입니다.”
“…그럼 혹시 다른 사람을 치료해준 적은 없는가?”
“아마 없을…”
아, 딱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여연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여진의 침략 때문에 집이 불탔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나를 불길에서 구해준 이가 있었다. 유모가 나에게 썼던 약초를 그 사람에게도 써준 기억이 있는데, 그러고보니 사람의 머리도 검은 머리칼이었… 어?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도 천민이었네. 큰 몸뚱이 덕에 전장에 끌려나가서 굶어죽지는 않았지. 아니, 차라리 굶는 것이 나았을까.”
여연에 오기 전 그에게 있었던 일이 항상 궁금하기는 했으나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억속의 나를 구해준 소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여, 여연에도 오신 적이 이, 있으신가요?”
“…있었지. 내 나이가 열셋이 되던 열여섯해 전에.”
“…!”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다른 곳들을 침략하던 시기였지. 나는 죽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죽였지만 그 날은 유독 퇴각하던 중, 불길 속에 남겨져 울고 있던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지.”
*****
지겹다. 사람의 비명과 울음소리, 피 냄새와 말 냄새, 살이 타는 냄새. 퇴각을 알리는 외침만이 내가 유일하게 기다리던 것이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뛰어 가던 중, 불길에 휩싸인 집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 사이에서 목놓아 울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도망 가야해, 이한. 지금 가지 않으면 이 곳에 남겨지고 그러면 너는 죽을거야. 머리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다리가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도, 구하려도 가지 못하는 순간 아이의 위로 기와가 떨어지려는 것이 보였다.
‘…위험해!!!’
본능적으로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간발의 차로 아이를 끌어안고 옆으로 굴러 기와와 불탄 나무들을 피했다. 엉엉 우는 아이를 들쳐 매고 산으로 무작정 달렸다. 마을이나 길에 나와 있으면 이 아이는 무조건 죽을 것이다. 침략자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숨어있어야 한다.
산을 한참 오르자 빈 동굴이 보였다. 발버둥을 치던 아이는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지만 동굴에 들어가 내려놓자, 구석으로 혼자 쪼르르 가버렸다. 젠장, 지를 구해준 게 누군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무를 찾아 나섰다. 이 추운 날을 버티기 위해서는 아무리 들킬 위험이 있더라도 불을 피워야한다. 다행히 동굴이기도 하고, 난장판이 된 마을이 때문에 산 쪽에서 나는 연기를 크게 신경 쓰는 이는 없을 것이다.
불을 겨우겨우 붙이고 주워 온 땔감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서야 앉아서 쉴 수 있겠군.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고 있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아이가 내 손을 툭툭 쳤다.
“…뭐.”
“파, 팔… 피가 나, 나요…”
왼팔을 봤더니 정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젠장, 아까 불 때문에 데인 건가… 뒤늦게 속에 입고 있던 옷을 찢어 급하게 지혈을 했지만 이미 상당한 양의 피를 흘렸는지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제길, 울지 마. 지금 울면 골이 울린단 말이야…
*****
타닥타닥, 불씨가 튀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자 내 옆에 누워서 자고 있는 아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강 둘러봤지만 그 사이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이게 뭐지?’
왼팔의 상처에 풀떼기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일부는 짓이겨져 있었다. 입에는 텁텁하고 쓴 맛이 느껴졌다. 꺼져가는 불씨에 장작을 더 넣기 위해 일어나려는데 옆에 누워있던 꼬마가 움찔거렸고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내 손과 닿았다. 이 추운 날에 나가서 약초를 찾아 헤매기라도 했는지 손은 빨갛게 되어있었고 내 상처에 붙여주고 남은 풀들이 쥐어져있었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이 꼬마가 나를 치료라도 한건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목에도 무언가 걸린 것처럼 먹먹해졌다. 아까 집도 보니까 크더만, 너 같은 부잣집 아이가 나 같은 게 뭐라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파리 목숨인데.
‘너는... 내가 지켜줄게.’
*****
“아침에 잠든 아이를 멀쩡한 집 앞에 내려두고 나는 조심스럽게 도망쳤지. 다행인지 아무도 내가 반나절 동안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더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의 모습은 희미해졌지만 붉은 머리칼과 회색의 눈만은 기억에 남아있었지.”
그가 날 바라봤다.
어렸을 때, 나를 구해줬던 그 눈이다. 어찌 이를 잊고 살고 있었을까?
“…맥낭자를 처음 봤을 때 알 수 있었오. 그 때 내가 구했던 아이가 바로 맥낭자라는 것을.”
“미처 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소, 송구하옵니다.”
“어렸을 때니까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지. 낭자에게 뭐라고 하려는 것이 아니오. 이 이야기를 꺼낸 연유는… 낭자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서라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리 내 의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대의 마을을 침략했던 오랑캐지 않나. 내가 직접 이 땅에 온 것은 그 때뿐이었으나 이후에도 내 민족이었던 사람들이 그대의 마을을 계속 괴롭게 하였고. 맥낭자에게 만큼은 꼭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소.”
“괘, 괜찮습니다… 오래 전의 이, 일이고 지금의 나리께서는 오랑캐를 무, 무찌른 조선의 장군이시지 아, 않으십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여러 감정이 들었다. 그가 여진족이었다는 사실을 듣는 것과 직접 우리 마을을 침략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내 기억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나를 구해준 사람이라니. 그 사람이 나으리라서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오래전이고 나라님들의 문제지, 그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저,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와서 정신이 없을 뿐이다.
“나를 원망하거나 그러지는 않소?”
“무엇을… 마, 말입니까?”
“…이런 나를.”
순간 그의 검은 두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지자 얼굴이 화끈거려 살짝 고개를 내렸다.
“이런 나으리가 어떤 나으리인지는 모, 모르겠으나…”
나는 발 옆에 작은 꽃을 하나 똑 떼어 이한에게 주며 말을 이었다.
“열여섯 해 전, 나, 나으리가 저를 구해주신 덕에 제가 조, 좋아하는 이 아름다운 푸, 풍경을 보며 자, 자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옵니다.”
진심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가 나를 구해준 덕분에 지금 이 언덕에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가 새로 군수로 와준 덕에 그를 만날 수 있었고 분에 겨운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으니까.
그는 내가 주는 꽃을 받아들고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침묵이 이어지고 잠시 뒤 이한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지.”
언덕을 내려와서 대문 앞에 섰을 때는 생각보다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색한 공기가 싫어 나는 용기를 가지고 먼저 인사를 했다.
“오, 오늘 멋진 풍경 보여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나리의 이야기를 해 주신 것도요.”
“나야말로.”
“그럼 이만 드, 들어가보겠습니다.”
“아, 맥 낭자.”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나를 다시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한참 떨어져 있던 그는 나에게 한 걸음씩 가까워져 어느새 눈 앞에서 멈췄다.
“…꽃잎이 붙었소.”
매화 꽃잎을 떼어주는 그의 손길에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로 변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 숙이고는 뒤를 돌아 걸어갔다.
심장이 팔딱팔딱, 물고기처럼 뛰는 것이 느껴졌다.
*****
해가 오래오래 하늘에 머물던 그 날에도 나는 우신과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한 소리에 집중이 깨졌다. 바깥을 살펴보려고 일어서려는 찰나, 우신이 말을 건넸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했더니, 자성군에서 사람이 왔나 봅니다.”
“자성군…이요?”
“예. 연초에 있던 전쟁 때문에 여연군 옆에 임금님께서 새로 세우신 곳 말입니다. 조정에서 으리으리한 지원을 받으면서 군수가 온다고 하던데, 바로 옆인 이 곳도 방문하겠다고 서신이 왔습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니 더 늦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쪽도 우리 장군님처럼 급한 성격이신가 봅니다.”
기지개를 쭉 펴며 우신이 일어났다. 나도 보던 서책을 정리하고 우신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그의 추측대로, 관아에는 못 보던 색의 갑주를 입은 군사들이 빼곡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자는 가장 전방에 서있는 백발 같은 흰 금발의 사내였다. 평생 이한 장군님보다 큰 사람은 못 볼거라 생각했는데…
“여기가 바로 오랑캐가 군수라던 그 여연군이군. 북쪽 놈들에게는 손님을 맞이하는 기본적인 예절조차 없나보지?”
“…범석도(汎晳道) 가의 이환(䏪絙),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군.”
“오랜만이네, 곽임수 가의 이한. 어때, 여기에서는 자네 고향이 잘 보이나? 아, 뒷꽁무니가 보이지 않게 도망들 갔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겠군. 크하하하-”
이한 옆에 서있던 우신을 포함한 다른 가신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정작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이한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동조차 없어 보였으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어찌 저리 무례한 언행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이한 장군이 여진족 출신이라 할 지라도 엄연히 나라님께서 명하신 군수이자 장군인데, 이리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욕이라니. 힘을 꽉 준 이한의 손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이 떨어졌다.
“…이, 이한 장군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 목숨과 땅을 지키셨습니다. 군수 나리께는 이 여연이 고향이자 터전과 다, 다름없습니다만, 이 아름다운 마을이 보, 보이지 않는다니 참으로 가, 가여운 눈이십니다.”
“호오? 이제보니 손님을 맞이할 시간은 없고 계집과 노닥거릴 시간은 있었나 보군? 개 버릇 제 못 준다더니.”
끊이지 않는 그의 언사에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확 올렸다. 그런데 햇빛에 비쳐 반짝거리는 머리칼이 어느새 코 앞에 있었고 가마솥 뚜껑 만한 손이 내 턱 끝을 붙잡았다. 나는 너무 놀라 숨을 헉 들이마셨다.
“흠… 그래도 계집 보는 안목은 나쁘지 않군.”
“당장 그 손 치워.”
“그런데 이거 어쩌나? 아무리 혼례를 올려도 자네는 오랑캐 딱지를 뗄 수 없을 텐데.”
“...그 손 치우라고 했다.”
우악스럽게 위로 끌려간 내 얼굴을 사내가 흔들흔들 하더니 툭 내려놓았다. 그가 나에게서 떨어지자 마자 이한은 나를 제 뒤로 끌어왔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 이상은 못 봐주겠군요. 그만하십시오, 이환 장군.”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장군의 언행을 이 곳의 모든 이가 보았습니다. 새로 온 군수의 명예를 어디까지 떨어트릴 수 있는지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여기서 멈추십시오.”
“…크흠!”
군사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나타나 사내를 말렸다. 놀랍게도 그 말 한마디에 그는 이한을 노려보던 눈을 치우고 비켜섰다. 이환을 제지한 여인이 이번에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뵙는 자리부터 여연군의 군수와 그 백성에게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자성군과 인근 국경선을 조정에 보고하는 일을 맡아 범석도 장군과 함께 온 오담인(悟談仁) 가의 안은서(安㒚棲)라고 합니다. 이제 여연군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윤허해주시겠습니까?”
차분히 용서를 구하는 말과 자기소개를 마친 안은서는 싱긋 웃으며 이한을 안으로 이끌었다. 처음 오는 곳일텐데도 매우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속으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한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우신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집은 관아만큼이나 시끌벅적했다. 종들은 개미 한 마리도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기세로 이곳저곳을 청소하고 있었고 부엌은 여러 음식과 재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어디를 싸돌아다닌 게야! 조금이라도 더 치장하지는 못할 망정!”
나를 향해 호통치는 아버지의 뒤로 슬쩍 들여다본 안채에서는 오은태가 한껏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성화에 나도 얼떨결에 함께 치장을 하게 되었다. 오은태의 치렁치렁한 은발 머리 옆에 있자니, 내 붉은 머리가 부끄러워져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집안이 이렇게 난리가 난 연유는 잠시 뒤에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관아에서 봤던 이환이라는 사내가 권이소 가의 집 안마당에 발을 딛은 것이다. 저 사내에게 턱 끝을 붙잡혔던 때가 생각이 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응? 아까 관아에서 본 계집이잖아.”
“예? 제 여식은 오늘 하루종일 집에만…”
“이 쪽 말고, 저 뒤에. 붉은 머리.”
이환이 나를 가리켰다. 큰일이다. 관아에서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했던 것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고개는 푹 숙이면서도 할 말은 다 하길래, 어떤 계집이 이리도 당돌한가 했더니, 여연군 대감 댁 여식이였군.”
“나, 나리! 소인이 미천한 제 여식을 대신해 사과를…”
“아닐세. 내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대감과 잠시 둘이서만 보고 싶은데.”
“아, 예. 이리로 들어오시지요.”
*****
이환의 기분 나쁜 방문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나를 매질할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셨다. 둘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맞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반면 예상치 못하게 소란스러워진 것은 관아 쪽이었다. 자성군으로 갈 줄 알았던 안은서가 여연군에 눌러 앉은 것이었다. 나와 우신이 정리해둔 서책을 보고는 탄성을 지르더니 그를 호위하는 호위무사 한 명을 제하고 이환과 다른 사람들은 자성군으로 보냈다. 덕분에 우신에게 듣지 못했던 새로운 학문과 한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우신에게 배운 것만 해도 새로운 것이 가득이었는데, 아직도 배울 것이 이리 많다니. 조금은 벅차지만 기분 좋은 압박감이었다. 다만, 우신과 안은서 두 사람이 서로 옥신각신 하는 것을 말리는 건 조금 힘들었다.
“그런 방식은 비효율적입니다. 아직도 궁에는 돌처럼 머리가 단단히 굳어 있는 사람들 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까?”
“거 말이 지나치네! 집현전에서 주상전하와 수많은 학자들이 밤낮을 고민한 결과물인데! 자네야말로 중책을 맡기 싫다면서 이방으로 온 주제에 효율을 탓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하네!”
오늘도 어김없이 안은서가 궁에서 가져온 서책을 보며 둘의 말다툼이 시작됐다. 나는 둘을 말려볼까 고민했지만 내가 먼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선선한 가을 바람이 벌써 불어오고 있었다. 해가 짧아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집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옮기자 귀신같이 이한이 나를 찾아왔다.
“오늘은 우신이나 안은서가 괴롭히지 않았소?”
“여, 여전합니다. 밤도 일찍 찾아와 머, 먼저 나왔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오늘 안은서가 새롭게 보여준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에 대한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권이소 가의 집 대문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가볍게 목례를 하고 들어가려는 찰나, 이한이 내 손을 잡았다.
“…맥 낭자.”
“예?”
“행여라도 불쾌하시다면 말해주시오.”
“그, 그게 무슨…”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가 얼굴을 숙여 나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온 몸이 단단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잠시 머물러있다 떨어졌다. 나를 감싸 온 그의 몸은 무척이나 커다랗고 따뜻했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나, 나으리. 지금 제 귀에 드, 들리는 소리가 나으리의 소리가 마, 맞습니까?”
“……”
그는 무어라 답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다 이내 포기하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귀 끝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이리 거대한 사내도 부끄러워하는 순간이 있다는 점이 새삼 귀여워서, 나도 그를 같이 끌어안았다.
“맥 낭자, 내가 이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오?”
“제, 제 머리가 마치 붉은 구름 같다고 하신 거, 것이요?”
“아니, 그거 말고.”
“저는 어, 어떤 색의 저고리든 아리땁다고 해, 해주신 것이요?”
“그것도 말고.”
“나, 나리께서 말씀해주세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나으리는 연신 미안해하면서도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연모하오.”
아아, 저 말을 처음 들은 그 순간을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저, 저도 연모합니다. 나으리.”
그는 내 대답을 듣고는 다시 쑥스러운 듯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둘이 껴안고 한참을 조곤조곤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나는 아쉬워하는 그를 달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온기와 체취를 남몰래 만끽하고 있던 나를 꿈에서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맥설화! 당장 안방으로 오거라!”
오랫동안 겪어온 두려움과 공포는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붙잡고 아버지가 계신 안방으로 갔다. 아버지가 나를 안방으로 부르는 경우는 매를 때리는 날 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나를 부르시는 걸까? 집 안에서 쥐 죽은 듯 있지 않고 무려 관아에 들락날락 해서? 내가 감히 품으면 안 되는 행복을 품고 살아서?
“보름 뒤, 자성군의 군수와 너의 혼례가 있을 것이다.”
“…네?”
“이제는 귀까지 먹었느냐? 군수 나으리께서 친히 애물단지 같은 너를 받아주겠다고 하셨단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에서 들려온 말은 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자성군 군수라면 범석도 가의 이환? 그럴리가 없다. 그와 내 만남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는데.
“아, 아버지, 무, 무언가 착오가…”
“그래. 나도 처음에는 군수 나리가 오해를 한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쪽이 먼저 너와 혼례를 치르고 싶다고 했다. 어디 쓸 데도 없이 밥만 축내던 것의 덕을 볼 줄이야… 어찌 되었든! 다음주에 자성군으로 모두 이주하고 나는 자성군의 호방이 되기로 했다.”
“하, 하오나 아, 아버지…”
“지금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이만 썩 물러가거라. 이제 밖에 나돌아다니지 말고 혼례 준비에나 신경 써라.”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났다. 내 방으로 발을 옮기다 결국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혼례? 혼례라니. 그것도 이환과? 그리고 그 대가로 아버지는 관직을 얻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여러가지 목소리들을 뚫고 하나의 소리가 머리에 꽂혔다. 나는 종들이 없는 틈을 타,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나와 관아로 무작정 달려갔다. 치마에 흙이 묻고 머리는 풀어져서 이리저리 휘날렸지만 그 무엇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권이소 가의 맥설화 낭자 아니십니까? 이 시간에 어찌하여…”
“이… 이한을… 헉헉… 군수 나으리를 부, 불러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평소 자주 보던 보초 병사는 그 즉시 달려가 이한을 불러왔다. 그는 숨이 차서 헉헉 거리는 나를 그의 침소로 데려가 냉수를 주며 나를 다독였다. 차가운 물과 대비되는 따뜻한 그의 품에서 긴장이 풀리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맥 낭자, 무슨 일이오?”
“아버지… 아, 아버지가… 저를 자, 자성군 군수에게 시집을 보, 보내신대요…”
“…뭐?”
“그 대, 대가로 아버지는 자성군의 호, 호방이 되신다고… 심지어 그, 그 쪽에서 저를 머, 먼저 원했대요...”
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정도로 굳어진 그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훌쩍이는 나를 토닥이는 손길은 여전했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그가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내 훌쩍임이 멈추고 눈물자국까지 다 말라갈 때쯤, 그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맥 낭자.”
“예.”
“나를… 연모합니까?”
“네. 저희가 하, 함께 바라보았던 하, 하늘만큼 연모합니다.”
“…그러면 우리, 도망갑시다.”
“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되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내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 곳으로 갑시다. 권이소는 자신이 정한 바를 어떻게든 행하려고 할 것이오. 전부터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은 알았으나… 아예 자성군 군수와 거래를 한 이상 무를 수는 없을 터이니, 아예 멀리 멀리 가버립시다.”
“그, 그렇지만 이 곳은 다, 당신이 사지에서 고생해서 겨우 어, 얻게 된 땅이자 집이 아닙니까…? 구, 군수님을 따르는 병사들은 어, 어떡해요? 이 모든 것을 저, 저 하나 때문에 버리게 할 수는 어, 없습니다.”
“맥 낭자가 없는데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오.”
전혀 설득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를 말려도 그는 오히려 도망간 이후에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내게 주기 위해서 역으로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실랑이는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 뚝 끊겼다.
“저, 나리. 정말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신이냐. 물러가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신과 함께 전혀 생각치도 못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서였다. 안은서는 손에 쥐고 있던 서책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새로 받은 천문도를 우신과 같이 보다가 의도치 않게 엿들었습니다. 맥설화 낭자의 아버지, 권이소 대감이 맥설화 낭자를 자성군 군수와 혼인시키고 자신은 한 자리를 하겠다 이겁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이한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이 이한 장군은 둘이서 도망가자는 것이구요?”
“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습니까! 맥설화 낭자는 내가 안 그래도 한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지금 뭐라고…”
이한이 말릴 틈도 없이 그의 손에서부터 안은서가 내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다름아닌 왕실의 증표였다.
“나는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조선 팔도의 인재들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전하의 큰 뜻을 함께 이룰 수 있는 학자들을 찾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나는 맥설화 낭자를 한양으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는 상황에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나는 겨우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저, 저 같이 부족하고 미, 미천한 자가…”
“아뇨. 맥설화 낭자는 이때까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새로운 것에 이해가 빠른 사람이었어요. 맥설화 낭자는 충분히 총명하고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이때껏 여자라고 더 배움을 받지 못해서 아쉬웠던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집현전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함께 학문을 추구하고 자신이 배운 것을 백성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여연군을 위해 힘쓰는 맥설화 낭자 같은 사람이 꼭 가야하는 곳이죠. 또한 그렇게 하면…”
안은서가 이한을 지긋이 노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말도 안 되는 도망을 치지 않아도 되죠.”
“…주상께서 비밀리에 무언가를 하고 계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한이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동요할 줄 알았던 안은서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나, 역시 장군은 소식이 빠르십니다.”
“또한 그 일은 절대로 외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기 때문에 관련된 이들은 사실상 고립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이미 밖으로 다 새어갔네. 앞으로는 더 주의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연유로 무려 이 나라의 공주께서 직접 부탁하지는 않으실 것도 압니다.”
“아니, 장군! 나를 그 잠깐 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구요?”
고…공주? 집현전 이야기만으로도 혼란스러웠는데 공주…? 꿈 같은 말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 우신은 알고 이, 있었어요?”
“…저는 여연군에 오기 직전까지 궁에 있던 사람입니다. 모를 리가 없죠.”
“세, 세상에…”
“이렇게 알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하하. 정식으로 다시 소개할게요. 주원(主院) 가의 안예슬(婩藝璱) 입니다. 주상전하의 여식이자 조선의 공주이죠.”
안은서, 아니 안예슬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나의 손을 흔들었다. 정신이 멍해지고 있는 나를 이한이 겨우 붙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제 거의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몇 달, 몇 해가 걸릴지도 모르는 세월을 그저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란 말입니까?!”
“이대로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서 기약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공주마마,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장군이 용납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요? 결국 맥설화 낭자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인데.”
“네…?”
“맥설화 낭자, 잘 생각해봐요. 이거는 맥설화 낭자를 위해서도 제안하는 거예요.”
“예, 예. 그러니까 장군도 마마께서도 일단은 진정하십시요.”
우신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두 사람을 겨우 떼어놓아 앉혔다. 나도 그제서야 진정하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한양, 집현전.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곳이다. 그러나 그 곳에 있는 동안 서신을 주고받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여연군과 한양의 거리만 해도 꽤 되니… 그리고 이한의 말에 따르면 떨어져있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 지조차 가늠이 안 된다. 그와 떨어져서 한 세월을 보내야한다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도망가자고 할 수는 없었다. 사지에서 함께 싸워 얻은 전우들, 여연군 군수로써 쌓은 모든 것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공주마마의 뜨, 뜻대로 하겠사옵니다.”
“맥 낭자!”
“역시 현명한 선택이에요. 자, 그럼 어떻게 한양으로 갈 지를 얘기 해야하는데…”
안예슬이 이한의 눈치를 슬쩍 봤다. 그의 분노와 슬픔이 함께 있는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선 둘이 먼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우신, 우리는 갑시다.”
우신과 안예슬이 나가자마자 나에게 무섭게 퍼부을거라 생각했던 이한은 예상 외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아주 부드럽게 내 손을 잡고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머리로는 이게 맞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또 다시 낭자를 잃고 싶지 않소.”
“……”
“나는 낭자 없이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딜 자신이 없소.”
“나, 나으리…”
나와 맞잡은 그의 손이 떨려왔다. 그는 굵은 물방울이 그의 손 위에 떨어지는 것조차 모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파 보이는 그를 안아주는 것밖에 없었다.
“나으리, 저, 저는...”
“……”
“나으리 덕분에 누, 누군가가 저를 생각해준다는 것이 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으리 덕분에 어렸을 적 모, 목숨을 건지고, 나으리께서 뒷방에서 쥐 죽은듯이 살던 저를 해, 햇살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런 나으리께 저 때,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시라고 가, 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맥…”
“나으리… 여, 연모합니다. 이 마음은 겨, 결코 변치 않을테니 나으리께서도 그, 그리하여 주세요.”
그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가 말없이 나에게 동의해줄 때 하던 표현이다. 나를 토닥여주던 그의 손길을 따라해 그의 넓은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더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고리가 젖는 것이 느껴졌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또한 그와 함께 울고 있었기 때문에.
다… 괜찮을 거예요.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는 말없이 부서질 듯 나를 끌어안았다. 야속하게도 밤은 깊어져만 갔다.


*****
“으아아- 드디어 끝이다!”
“정말 끝일까요? 내, 내일 분명 새로운 명이 새, 생길텐데요.”
“생기더라도 내일 생기는 거니까요. 오늘은 그만 침소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안예슬은 기지개를 쭉 피고는 펼쳐져 있던 서책을 한꺼번에 덮어버렸다. 쭉 뻗은 두 팔을 뒤로 젖히자, 뚜두둑-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맥설화, 정말 더 머물 생각은 없어요?”
“마, 말씀만으로도 황송하옵니다.”
나는 싱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고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고 밖으로 나왔다. 하얀 입김을 불며 나는 침소로 향해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문득, 고향을 떠나오던 날이 떠올랐다.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던 안예슬은 한양으로 전령을 보내더니, 나를 등용하겠다는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아왔다. 조정에서 온 서신을 본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굴은 구겨지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집안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나 안은서와 이한이 직접 확인을 시켜주자 결국 안마당에 주르륵 주저앉아버렸다. 혹여라도 아버지의 마음이 바뀔까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 한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렇게 여연을 떠나, 집현전에서 영명한 사람들과 함께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글자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면서 맞는 열셋째 겨울이다. 긴 시간이었지만 어떻게 흘러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공부에 집중했다. 나를 필요로 해주신 공주마마와 임금님께 보답을 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매일 밤 달빛에 그리던 한 사람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기도 했다.
곤히 잠에 들어있는 친우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짐을 싸둔 덕에 떠나기 하루 전날 밤인 지금 당장 챙겨야 하는 것은 크게 없었다. 완전히 보따리를 여미기 전, 한양에 있는 동안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을 꺼냈다.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나는 이한과 두어달에 한 번 정도 서신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문자를 연구하는 일은 사실상 밀명에 가까웠기 때문에 서신은 누군가의 눈을 거쳐야 했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얼마나 많이 그를 그리워하는지 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자기 전 매일매일 본 탓에 이미 꼬깃꼬깃해졌지만 하루도 그의 서신을 보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낭자와 함께 했던 그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나는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서신을 가슴에 가져가 꼭 쥐었다. 이제 내일이면 그를 보기 위해 떠난다. 출발하면서 먼저 이한에게 보낼 서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지독하게도 피곤했지만 그를 곧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
혹여라도 눈이라도 올까 염려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돌아가는 길은 평온했다. 생각보다 추운 것만 빼고.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추위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량한 들판과 드문드문 남아있는 눈 때문인지 전혀 낯선 곳에 도착한 기분이었지만 한참을 길을 가다 눈에 익은 길이 나타나자, 나는 천천히 말을 몰아 내 마음이 기억하는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꿈에서도 수없이 올랐던 그 언덕에 도달하자, 나는 안장에서 내려와 찬찬히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보고싶은 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앞을 보고 걸으셔야죠, 맥 낭자.’
그와 함께 했던 곳에 도착하자 나는 치마를 잡던 손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운 겨울에도 여전히 따스한 분위기가 맴도는 여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런 저런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아까는 보이지 않던 누군가가 언덕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한 번 멈칫 하더니 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거리가 되었을 쯔음, 나 또한 그 사람을 향해 같이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봐 주는 검은 두 눈과 마주쳤다.
-꽃보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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